웍(중식 프라이팬)과 국자는 중식요리사들에게는 필수품. 웍을 잡고 있는 형 여경래(왼쪽)씨와 웃으며 국자를 들고 있는 동생 여경옥씨.
[우리는 짝]
중식계 대부 요리사
여경래·여경옥 형제
중식계 대부 요리사
여경래·여경옥 형제
“국수 삶았어!”
전화기 너머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형은 3살 어린 동생이 기특했다. 동생은 서울 영등포구 허름한 중국집에서 배달만 하다가 음식다운 음식을 처음 만들었다. 행여 국수 한 가락이라도 놓칠세라 곁눈질로 익힌 순서를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 감격스러운 날,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그가 다이얼을 돌린 곳은 형이 일하는 중국집. 형 여경래가 19살, 동생 여경옥이 16살이었던 1979년의 일이다. 부마민주항쟁의 불꽃이 타오르고 유신독재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그해, 가난한 형제는 중식요리에 입문했다.
중학교 졸업뒤 중국집으로
30여년 외길, 각종 상받아 “형님이 저보다 3년 먼저 시작하셨어요. 이 직업이 좋은지 어떤지 몰랐어요. 형님이 하시니깐 무조건 따라갔어요.” 중식요리사 여경옥. 세 글자를 검색하면 화려한 이력이 펼쳐진다. 각종 국제 중식요리대회 수상, 국제대회 심사위원 위촉 등. 쓴 책만도 5권이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다. 여경래의 경력도 동생 못지않다. 2002년 말레이시아 국제요리대회 은상 등 국제대회 수상만 여러번이다. 두 사람이 강의하는 대학도 6곳이 넘는다. 각종 방송출연은 말할 것도 없다. 국내 중식계의 대표적인 형제 요리사 여경래(52)·여경옥(49)씨를 지난 18일 형이 총주방장으로 일하는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호텔 중식당 ‘홍보각’에서 만났다. 동생은 서울 마포와 광화문에 있는 고급 중식당 ‘루이’(Luii)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이 고향인 형제는 화교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국 산둥성이 고향인 아버지는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자주 집을 비웠던 아버지는 형이 6살 되던 해 세상을 등졌다. “하루 한 끼만 먹을 정도로 형편이 안 좋았죠. 어머니가 너는 중국 사람의 자손이니 중국 요리 기술을 배우라고 했어요.”(여경래) 며칠 뒤 서울에서 내려온 살집 좋은 ‘왕서방’을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서울 노량진의 한 중국집. 중학교를 막 마쳤을 때였다. 어머니한테는 “일주일을 울면서 고등학교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만” 막상 중국집 주방은 놀이터처럼 재미있었다. 경옥씨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뒤를 따랐다. “당연한 것으로 알았죠. 형이 남들보다 일찍 나가 열심히 일하라고 늘 말했어요.” 스승이 따로 없었다. 경래씨는 중식 요리사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았다. 실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도 잇따라 찾아왔다. “79년에 중국집 ‘거목’으로 옮겼어요. 정일권씨 같은 당대 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곳이죠.”
여경래가 최고로 꼽은 동생 여경옥 요리사의 요리는?
한 알 탕수육. 한 알, 한 알 튀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튀김옷에 재료를 미리 재워둔다. 일반 탕수육이 초벌을 미리 튀겨놓고 다시 튀기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데 반해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튀긴다. 더 바삭바삭하고 쫀득쫀득하다.
형님은
79년 요리비책서 얻고 눈떠
새벽까지 코피 흘리며 봤죠
5년 지나자 천직이구나 직감 ‘거목’ 부주방장은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특출났던 그를 눈여겨봤다. “아무도 모르게 중국요리 비책서를 주는 겁니다. 3권짜리 책엔 수백 가지 요리법이 있었어요. 몰래 새벽 4시까지 읽었죠. 코피를 줄줄 흘렸지만 그때 진짜 요리에 눈을 확 떴죠.” 중식당 ‘함지박’으로 옮긴 그는 고수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 계통의 최고 3인방 중 한 명인 오학재씨가 있었어요. 칼질은 그 사람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손도 빨라서 제가 요리 하나 겨우 만들 때 그는 일곱 가지를 내놨어요.” 경래씨는 정교한 기술과 화려한 장식의 대가였던 요리사 왕출량씨에게서도 배웠다. “5년이 지나자 소름이 쫙 돋는 순간이 온 거예요. ‘아,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월급도 올랐다. 76년 한 달 월급 6000원을 받던 그는 서울 시내 유명하다는 중식당을 두루 거쳐 크라운호텔에 입사한 82년 60만원을 받았다. “월급 셌지요. 부주방장이었는데 20여명의 요리사들을 두고 일했어요.” 80년대 초는 서울 시내에 특급호텔이 막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줄곧 팔래스·타워호텔 등 특급호텔 주방을 책임졌다. 경옥씨도 형이 불러 잠시 함께 일했던 거목에서 요리다운 요리를 처음 만났다. 물론 그도 고수를 만났다. 18살에 옮겨간 ‘홍보성’에서 일할 때였다. “조리사만 50여명인데, 총주방장 주은리씨는 여간 까다로운 분이 아니었어요. 오전 9시 출근인데 그분은 7시에 나오시는 겁니다.” 경옥씨는 주씨보다 먼저 출근해서 청소하고 양파를 깠다. 총주방장한테서 합격점을 받았다. 22살 신라호텔에 입사하기 전까지 경옥씨는 그에게서 요리를 배웠다. “호텔 갈 생각이 없었는데, 형님이 가보라는 거예요. 체계적으로 배우고 좋은 식재료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셨죠.”
여경옥이 최고로 꼽은 형 여경래 요리사의 요리는?
불도장. ‘맛있는 냄새에 끌려 스님이 담장을 넘었다’는 뜻을 가진 불도장은 각종 고급재료가 들어가는 요리다. 일반 불도장이 상어지느러미 등 지나치게 비싼 재료가 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여씨의 불도장은 전복, 송이, 새우, 오골계 등 거품을 뺀 재료로 맛을 냈다. 육수와 재료의 조화가 일품.
동생은
형이 호텔 도전해보라 권유
중식당 시작때도 그랬어요
요즘은 건강한 요리법 연구 신라호텔 입사는 만만치 않았다. 시내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몰렸다. 면접만 7번을 봤다. “필기는 잘 모르겠는데, 실기는 잘했어요.(웃음)” 5년만 있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간 신라호텔에서 그는 24년간 일을 했다. 형제는 같은 일을 하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형은 외향적이고 동생은 부끄러움이 많다. 형은 “확률이 50%만 되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인데, 동생은 뭐든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일을 시작했다. “형님은 바로 실천하시죠. 저는 계속 생각만 하고 있는데. 사람들도 잘 사귀고 한 번 사귀면 오래 유지하시죠.”(경옥) “동생은 섬세하고 어떤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요. 제가 큰 틀을 본다면, 동생은 세부적인 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봐요.”(경래)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지에서 열리는 국제 요리대회 참가, 국제대회 심사위원 활동 등도 경래씨의 추진력이 한몫했다. 경옥씨는 늘 그랬듯이 형의 뒤를 따랐다. 루이의 시작도 경래씨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힘들었다. “사업을 하라고 권한 것도 형님이시죠.” 음식은 사람을 따라간다고 했다. “제가 산초나 향신료를 넣어 매운맛이나 짠맛을 확실히 낸다면, 형님은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만드시죠.” 경래씨가 자랑하는 불도장은 육수 안에 해삼, 전복, 조개, 닭고기 등 10가지 넘는 재료가 들어가 담백한 조화를 이룬다. 흔히 들어가는 상어지느러미는 없다. 상어를 보호하자는 동물애호가들 의견에 그는 찬성한다. 미식가들에게 소문난 경옥씨 요리는 ‘한 알 탕수육’. 튀김옷에 재료를 미리 재웠다가 한 개씩 따로 튀긴다. 일반 탕수육을 뭉텅이로 재우고 한꺼번에 튀겨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꼼꼼하다. 차이점은 이것만 아니다. 동생 경옥씨는 7년 전 대만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했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경래씨는 여전히 종횡무진 현장을 달린다. 공통점도 있다.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 없어요. 잘 웃으시는 어머니의 영향이죠. 사천식 중국요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한국식 중국요리를 만들었어요. 한국인 입맛에 맞게 현지화한 거죠.”(경래) 이들이 만든 한국식 중국요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시원하다’ 말을 내뱉는 한국인들의 입맛에서 출발했다. 얼큰하고 매콤한 맛의 여운을 중국요리에 담았다. “중국 본토는 주재료에 충실해요. 닭고기 요리다 하면 닭고기만 들어가죠. 반면 한국의 중국요리에는 야채가 꼭 들어가죠.”(경옥) 형제의 우애담은 눈물겹다. “어릴 때 어머니께 회초리로 맞으면 경옥이가 같이 울었어요.” “형은 다친 저를 업고 3시간 넘게 걸은 적도 있어요. 결혼 초 형수님이 형님에게 ‘동생이랑 살아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아무리 우애가 좋다지만 다툼이나 갈등은 없었을까? “딱 한 번 있었어요. 잠시 함께 일했던 ‘거목’에서였죠. 주방장에게 잔소리 듣기 전에 제가 먼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늘 시켰어요. 그런데 동생이 어느 날 폭발한 거예요. ‘못해먹겠다’고 대들더군요. 한마디로 하극상이 일어난 거죠.(웃음)”, “아직 철모르고 겁도 많던 16살의 제가 형 등쌀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예요. 형님이 금방 용서해줬어요.” “그날 이후로 절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경래) 형제는 그 뒤로 한 가지 원칙도 정했다. ‘불가근불가원’이다. “같은 일을 오래 했고 둘 다 전문가니까 부딪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 우리가 정한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요.”(경래) “서로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만나면 단점을 지적하지 않아요. 형도 맞고 나도 맞다는 생각을 하죠. ‘나는 이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합니다. 들었을 때 속으로 아니다 싶어도 돌아서면 내 주방에 들어와 어느새 형님의 조리법을 시도해보게 돼요.” (경옥) 형제는 요즘도 일주일에 2~3번 만나 중국요리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중식은 기름이 많고 건강에 안 좋다는 일반인들의 여전한 통념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찌고 삶은 다양한 중국요리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까 연구 중이다. 형에게 물었다. “동생은 어떤 요리사죠?” 경래씨는 빙긋 웃더니 “동생은 잘 자랐죠.” 동문서답이다. 동생도 비슷한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형님을 존경합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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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요리비책서 얻고 눈떠
새벽까지 코피 흘리며 봤죠
5년 지나자 천직이구나 직감 ‘거목’ 부주방장은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특출났던 그를 눈여겨봤다. “아무도 모르게 중국요리 비책서를 주는 겁니다. 3권짜리 책엔 수백 가지 요리법이 있었어요. 몰래 새벽 4시까지 읽었죠. 코피를 줄줄 흘렸지만 그때 진짜 요리에 눈을 확 떴죠.” 중식당 ‘함지박’으로 옮긴 그는 고수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 계통의 최고 3인방 중 한 명인 오학재씨가 있었어요. 칼질은 그 사람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손도 빨라서 제가 요리 하나 겨우 만들 때 그는 일곱 가지를 내놨어요.” 경래씨는 정교한 기술과 화려한 장식의 대가였던 요리사 왕출량씨에게서도 배웠다. “5년이 지나자 소름이 쫙 돋는 순간이 온 거예요. ‘아,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월급도 올랐다. 76년 한 달 월급 6000원을 받던 그는 서울 시내 유명하다는 중식당을 두루 거쳐 크라운호텔에 입사한 82년 60만원을 받았다. “월급 셌지요. 부주방장이었는데 20여명의 요리사들을 두고 일했어요.” 80년대 초는 서울 시내에 특급호텔이 막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줄곧 팔래스·타워호텔 등 특급호텔 주방을 책임졌다. 경옥씨도 형이 불러 잠시 함께 일했던 거목에서 요리다운 요리를 처음 만났다. 물론 그도 고수를 만났다. 18살에 옮겨간 ‘홍보성’에서 일할 때였다. “조리사만 50여명인데, 총주방장 주은리씨는 여간 까다로운 분이 아니었어요. 오전 9시 출근인데 그분은 7시에 나오시는 겁니다.” 경옥씨는 주씨보다 먼저 출근해서 청소하고 양파를 깠다. 총주방장한테서 합격점을 받았다. 22살 신라호텔에 입사하기 전까지 경옥씨는 그에게서 요리를 배웠다. “호텔 갈 생각이 없었는데, 형님이 가보라는 거예요. 체계적으로 배우고 좋은 식재료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셨죠.”
형이 호텔 도전해보라 권유
중식당 시작때도 그랬어요
요즘은 건강한 요리법 연구 신라호텔 입사는 만만치 않았다. 시내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몰렸다. 면접만 7번을 봤다. “필기는 잘 모르겠는데, 실기는 잘했어요.(웃음)” 5년만 있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간 신라호텔에서 그는 24년간 일을 했다. 형제는 같은 일을 하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형은 외향적이고 동생은 부끄러움이 많다. 형은 “확률이 50%만 되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인데, 동생은 뭐든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일을 시작했다. “형님은 바로 실천하시죠. 저는 계속 생각만 하고 있는데. 사람들도 잘 사귀고 한 번 사귀면 오래 유지하시죠.”(경옥) “동생은 섬세하고 어떤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요. 제가 큰 틀을 본다면, 동생은 세부적인 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봐요.”(경래)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지에서 열리는 국제 요리대회 참가, 국제대회 심사위원 활동 등도 경래씨의 추진력이 한몫했다. 경옥씨는 늘 그랬듯이 형의 뒤를 따랐다. 루이의 시작도 경래씨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힘들었다. “사업을 하라고 권한 것도 형님이시죠.” 음식은 사람을 따라간다고 했다. “제가 산초나 향신료를 넣어 매운맛이나 짠맛을 확실히 낸다면, 형님은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만드시죠.” 경래씨가 자랑하는 불도장은 육수 안에 해삼, 전복, 조개, 닭고기 등 10가지 넘는 재료가 들어가 담백한 조화를 이룬다. 흔히 들어가는 상어지느러미는 없다. 상어를 보호하자는 동물애호가들 의견에 그는 찬성한다. 미식가들에게 소문난 경옥씨 요리는 ‘한 알 탕수육’. 튀김옷에 재료를 미리 재웠다가 한 개씩 따로 튀긴다. 일반 탕수육을 뭉텅이로 재우고 한꺼번에 튀겨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꼼꼼하다. 차이점은 이것만 아니다. 동생 경옥씨는 7년 전 대만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했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경래씨는 여전히 종횡무진 현장을 달린다. 공통점도 있다.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 없어요. 잘 웃으시는 어머니의 영향이죠. 사천식 중국요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한국식 중국요리를 만들었어요. 한국인 입맛에 맞게 현지화한 거죠.”(경래) 이들이 만든 한국식 중국요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시원하다’ 말을 내뱉는 한국인들의 입맛에서 출발했다. 얼큰하고 매콤한 맛의 여운을 중국요리에 담았다. “중국 본토는 주재료에 충실해요. 닭고기 요리다 하면 닭고기만 들어가죠. 반면 한국의 중국요리에는 야채가 꼭 들어가죠.”(경옥) 형제의 우애담은 눈물겹다. “어릴 때 어머니께 회초리로 맞으면 경옥이가 같이 울었어요.” “형은 다친 저를 업고 3시간 넘게 걸은 적도 있어요. 결혼 초 형수님이 형님에게 ‘동생이랑 살아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아무리 우애가 좋다지만 다툼이나 갈등은 없었을까? “딱 한 번 있었어요. 잠시 함께 일했던 ‘거목’에서였죠. 주방장에게 잔소리 듣기 전에 제가 먼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늘 시켰어요. 그런데 동생이 어느 날 폭발한 거예요. ‘못해먹겠다’고 대들더군요. 한마디로 하극상이 일어난 거죠.(웃음)”, “아직 철모르고 겁도 많던 16살의 제가 형 등쌀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예요. 형님이 금방 용서해줬어요.” “그날 이후로 절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경래) 형제는 그 뒤로 한 가지 원칙도 정했다. ‘불가근불가원’이다. “같은 일을 오래 했고 둘 다 전문가니까 부딪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 우리가 정한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요.”(경래) “서로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만나면 단점을 지적하지 않아요. 형도 맞고 나도 맞다는 생각을 하죠. ‘나는 이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합니다. 들었을 때 속으로 아니다 싶어도 돌아서면 내 주방에 들어와 어느새 형님의 조리법을 시도해보게 돼요.” (경옥) 형제는 요즘도 일주일에 2~3번 만나 중국요리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중식은 기름이 많고 건강에 안 좋다는 일반인들의 여전한 통념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찌고 삶은 다양한 중국요리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까 연구 중이다. 형에게 물었다. “동생은 어떤 요리사죠?” 경래씨는 빙긋 웃더니 “동생은 잘 자랐죠.” 동문서답이다. 동생도 비슷한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형님을 존경합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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