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 문제에 있어 한국사회는 중·일과 미국에 대한 ‘이중잣대’가 존재한다. 민족의식 ‘과잉’ 현실과 ‘숭미사대주의’가 공존하는 셈이다. 동북공정 중단 촉구 시위(왼쪽)와 독도 관련 시민단체의 반일 시위 현장(오른쪽). 〈한겨레〉자료사진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
5. 현실적 역할 엄존한다.
지난 4주 동안 민족과 탈민족 혹은 중도적 관점의 논자 4명이 논쟁을 펼쳤다.
논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근대 이전 민족 관념의 실체가 있었는냐의 문제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진단했다. 반면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으며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는 시각을 보였다.
또 다른 논점은 민족주의가 피지배 계급 저항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안 교수는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 했고 임지현 한양대 교수도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피지배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했다.
두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민족주의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면서도 구체적인 사회적 힘인 민족을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이 글에서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실사구시적 설명이 부족하다면서 계급연대는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6회와 7회는 권혁범 대전대 교수와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각기 주장을 펼친다. 애초 5회로 연재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이 주제에 대해 학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이 쏟아져 논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2회 늘리기로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진보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논지를 펼쳐 달라고 청탁을 받기는 했지만 평소 필자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그런 논쟁은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한국사회 연구자들을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었다. 그런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한국사회를 연구한 성과란 서양에 비해 크게 뒤진다. 아직도 기초적인 사실규명에 급급한 처지여서 연구성과에 바탕을 둔 이론적 체계화가 크게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에서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전개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 논쟁이 실제적이고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민족주의적 가치를 두고 허심탄회한 논의를 이끌어 내보고 싶어 청탁에 응하여 기고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를 기해 한국사회에 대한 심화된 분석이 이루어지고 세계사적인 시야가 확보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최근 4개 텔레비전 방송은 서로 앞다투어 가면서 고구려 시대를 소재로 한 연속사극을 방송해오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창작된 드라마일 뿐이지만 이른바 중국 동북공정 문제로 야기된 민족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분명 올바른 역사 인식과 거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과장된 민족영웅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독도문제로 인해 거의 주기적으로 일본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촉발되곤 한다. 상대국들이 문제를 야기하고 빌미를 제공한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사회는 이런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해 온 것이다. 때로는 그동안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쏟아내듯 맹목적으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사회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세련되지 못한 낙후한 역사인식인 것이며 때로는 광풍에 가깝다고 할 만큼 과도한 점이 있다. 동북공정·독도 관련 맹목적 반응
민족인식 ‘과잉’ 측면 방증하지만
중·일 아닌 미 정부 비판은 불가능
‘숭미사대주의’ 해법 ‘민족’에 있어 이런 예에서 드러나듯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적 인식이 과잉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민족 정서를 건들면서 파고들면 쉽게 흔들리곤 했다. 거기에는 대중의 정서를 악용해 온 정략적 의도, 상업주의, 기득권 세력의 책동들이 얽혀 있다. 그에 따라 때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런 정서를 악용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와 사회통제가 횡행해 왔다. 그와 같은 과잉된 현상이 두드러진 경우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중국과 관련되는 역사와 영토 문제 등에서 쉽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대외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대응이다. 그러나 다 같은 대외 문제이지만 미국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현재 반세기가 넘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어찌됐건 민족 내부문제 때문에 주둔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초국적 자본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행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일 미국 정부를 비난한다면 사회적으로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 예컨대 어떤 경우라도 학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함에도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한 맥아더의 책임을 논했다고 하여 2심 재판까지 진행된 현재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이다. 정치인들은 훨씬 제약이 심해 만일 발언 가운데 실수로라도 반미적 표현이 들어간다면 그런 경우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국에 민족주의란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민족주의가 아니라 숭미사대주의라는 설명이 합당할지 모르겠다. 이는 19세기 서양에서 시민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형성되던 조건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인식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주노동자 문제가 상징하는 것처럼 저성장국 사람들을 상대로 표출되는 흔히 졸부 근성이라고 비난받는 일부 한국인들의 행태이다. 참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라고 봐야지 그것을 민족성 내지 민족주의 탓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는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일시적 부작용이며 한때 일본관광객들에게서 제기되었던 문제와 비슷한 현상이다. 개개인들의 성숙된 인식이야말로 공동체를 매개로 형성되는 자율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순기능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를 마치 시대착오적 민족주의가 전횡한다고 하는 획일적 시각으로 재단하여 비난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왜곡된 편향이다. 개인들의 일탈을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 인식하는 것은 지난날 일제침략을 위한 식민주의 사관과 다르지 않다. 이주노동자·저성장국 폄하 문화
‘민족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해야
“민족이 계급연대 저해” 주장보다
분단·차별 대응 방안 모색해야 셋째로 가장 맹목적 행태는 안으로 노동자 파업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목도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반응이다. 한국사회에서 자본은 파시즘적 비호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횡포를 자행하지만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은 권력의 야만적 탄압으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마저 양보해야 한다. 자본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는 여론 몰이에 혹세무민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삼성재벌과 같은 공룡이 탄생하고 나라는 삼성의 수중에서 농락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자본의 시장논리는 노동자의 파업권이 확보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데도 삼성은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해 그러한 최소한의 공리마저 무시해 오다가 초역사적인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과 노동계급관계의 차원을 넘는다. 또 계급연대만으로 해결되기도 어렵다. 더욱이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더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오히려 더 열악해지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노동계의 동향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지난 199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당시 노동운동은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곧 노동자의 계급연대란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민족을 향해 나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식이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에 대해 변명한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세계사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탈민족을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적 주장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할 뿐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말하지는 않고 있다. 계급연대를 말하지만 이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설명은 부족하다. 때문에 그동안 민족의식을 매개로 지탱해온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기반과 역사성을 탈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허물어낸 틈새로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펼쳐지는 것은 아닌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저해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낡은 시대의식(민족주의)이 세계사적인 새로운 흐름(탈민족 계급연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인식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의 개념 정의나 이론도 아니고 또 민족의식에 책임을 전가하는 일도 아니다.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인 민족분단, 민중 차별과 갈수록 열악해지는 생존 조건,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의 야만적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그 점에서 여전히 진보적 민족주의의 할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두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민족주의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양상을 점점 지니게 되었다면서도 구체적인 사회적 힘인 민족을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이 글에서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실사구시적 설명이 부족하다면서 계급연대는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6회와 7회는 권혁범 대전대 교수와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각기 주장을 펼친다. 애초 5회로 연재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이 주제에 대해 학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이 쏟아져 논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2회 늘리기로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진보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논지를 펼쳐 달라고 청탁을 받기는 했지만 평소 필자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그런 논쟁은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한국사회 연구자들을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었다. 그런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한국사회를 연구한 성과란 서양에 비해 크게 뒤진다. 아직도 기초적인 사실규명에 급급한 처지여서 연구성과에 바탕을 둔 이론적 체계화가 크게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에서 서양의 이론을 끌어다 전개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 논쟁이 실제적이고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민족주의적 가치를 두고 허심탄회한 논의를 이끌어 내보고 싶어 청탁에 응하여 기고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를 기해 한국사회에 대한 심화된 분석이 이루어지고 세계사적인 시야가 확보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최근 4개 텔레비전 방송은 서로 앞다투어 가면서 고구려 시대를 소재로 한 연속사극을 방송해오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창작된 드라마일 뿐이지만 이른바 중국 동북공정 문제로 야기된 민족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분명 올바른 역사 인식과 거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과장된 민족영웅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독도문제로 인해 거의 주기적으로 일본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촉발되곤 한다. 상대국들이 문제를 야기하고 빌미를 제공한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사회는 이런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해 온 것이다. 때로는 그동안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쏟아내듯 맹목적으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사회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세련되지 못한 낙후한 역사인식인 것이며 때로는 광풍에 가깝다고 할 만큼 과도한 점이 있다. 동북공정·독도 관련 맹목적 반응
민족인식 ‘과잉’ 측면 방증하지만
중·일 아닌 미 정부 비판은 불가능
‘숭미사대주의’ 해법 ‘민족’에 있어 이런 예에서 드러나듯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적 인식이 과잉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민족 정서를 건들면서 파고들면 쉽게 흔들리곤 했다. 거기에는 대중의 정서를 악용해 온 정략적 의도, 상업주의, 기득권 세력의 책동들이 얽혀 있다. 그에 따라 때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런 정서를 악용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와 사회통제가 횡행해 왔다. 그와 같은 과잉된 현상이 두드러진 경우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중국과 관련되는 역사와 영토 문제 등에서 쉽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대외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대응이다. 그러나 다 같은 대외 문제이지만 미국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현재 반세기가 넘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어찌됐건 민족 내부문제 때문에 주둔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초국적 자본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행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일 미국 정부를 비난한다면 사회적으로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 예컨대 어떤 경우라도 학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함에도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한 맥아더의 책임을 논했다고 하여 2심 재판까지 진행된 현재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이다. 정치인들은 훨씬 제약이 심해 만일 발언 가운데 실수로라도 반미적 표현이 들어간다면 그런 경우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국에 민족주의란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민족주의가 아니라 숭미사대주의라는 설명이 합당할지 모르겠다. 이는 19세기 서양에서 시민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형성되던 조건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인식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주노동자 문제가 상징하는 것처럼 저성장국 사람들을 상대로 표출되는 흔히 졸부 근성이라고 비난받는 일부 한국인들의 행태이다. 참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라고 봐야지 그것을 민족성 내지 민족주의 탓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는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일시적 부작용이며 한때 일본관광객들에게서 제기되었던 문제와 비슷한 현상이다. 개개인들의 성숙된 인식이야말로 공동체를 매개로 형성되는 자율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순기능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를 마치 시대착오적 민족주의가 전횡한다고 하는 획일적 시각으로 재단하여 비난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왜곡된 편향이다. 개인들의 일탈을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 인식하는 것은 지난날 일제침략을 위한 식민주의 사관과 다르지 않다. 이주노동자·저성장국 폄하 문화
‘민족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해야
“민족이 계급연대 저해” 주장보다
분단·차별 대응 방안 모색해야 셋째로 가장 맹목적 행태는 안으로 노동자 파업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목도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반응이다. 한국사회에서 자본은 파시즘적 비호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횡포를 자행하지만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은 권력의 야만적 탄압으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마저 양보해야 한다. 자본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는 여론 몰이에 혹세무민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삼성재벌과 같은 공룡이 탄생하고 나라는 삼성의 수중에서 농락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자본의 시장논리는 노동자의 파업권이 확보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데도 삼성은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해 그러한 최소한의 공리마저 무시해 오다가 초역사적인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과 노동계급관계의 차원을 넘는다. 또 계급연대만으로 해결되기도 어렵다. 더욱이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더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오히려 더 열악해지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노동계의 동향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지난 199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당시 노동운동은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곧 노동자의 계급연대란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민족을 향해 나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식이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에 대해 변명한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세계사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탈민족을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적 주장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할 뿐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말하지는 않고 있다. 계급연대를 말하지만 이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설명은 부족하다. 때문에 그동안 민족의식을 매개로 지탱해온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기반과 역사성을 탈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허물어낸 틈새로 초국적 자본의 공세가 펼쳐지는 것은 아닌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민족의식이 계급연대를 저해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낡은 시대의식(민족주의)이 세계사적인 새로운 흐름(탈민족 계급연대)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인식을 주장하고 있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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