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하나의 노조를 꾸린 대구 삼우정밀 노동자들(맨 오른쪽).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집회(가운데)와 이주 노동자 합법화 기자회견 때 잡힌 장면들(맨 왼쪽).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
2. 유효하지 않다
지난 주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오랜 세월 유지해 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유대관계는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을 위치짓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안 교수는 또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낸 파괴적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외세가 지금도 “기득권층을 숙주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민족이 진보 진영에서 중심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에 대해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조선 말기 한국 사회는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이 강했다면서,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교적 문약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그 대체물로서 부강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주에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학계나 진보 운동계 일각에서 ‘탈민족’의 조류가 감지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민족’만큼 신성화돼 있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국민’/‘민족’ 담론에 호소하는 일이야 어디를 가나 흔하지만, 한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 양쪽은 아직까지도 ‘민족’에 대한 일종의 충성 경쟁을 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지난달 필자가 평소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은 개천절을 맞이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평을 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으로 이 땅 위에 나라를 세운 지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 하늘은 아직 다 열리지 않았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돌을 놓으시고 우리가 열어야 하는 하늘이다. 민주노동당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홍익의 정신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 나가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을 다짐한다.” ‘반만년의 역사’와 ‘단군 할아버지’의 역사성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계급 모순을 부정하는 ‘홍익’과 같은 수사를 노동계급의 정당이 이용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 현실 그대로다. 1993년부터 단군을 실재 인물로 선전함으로써 과학적 근대 사학 자체를 폐기했다 싶은 이북(북한)과 달리 적어도 이남(남한)의 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신화와 역사를 구분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배워야 할 만큼 ‘민족’의 신화는 여전히 사회 일반에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발원지인 유럽에서 이미 우파의 구시대적 전유물로 전락해버린 ‘민족’ 담론이 한국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한국에서의 ‘민족’의 불로불사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기도 전에 이미 고려·조선 왕조에 의해 천여 년 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운영돼 왔다. 그만큼 어느 전근대 사회보다 국가의식과 내부 동일성이 높았다. 거기에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가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자기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 담론은 사회의 통념이 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계에서 동질성이 가장 높은 민족인 우리를 미·소 양국이 강제로 분단시켰으니 자연히 분단 극복 지향의 민족주의 담론이 진보적 사고의 중추로 굳어졌다.” 이런 설명은 꼭 틀리지는 않지만 오늘과 같은 ‘민족’의 위력을 과거에 무비판적으로 투영시킴으로써 한국 역사가 마치 ‘민족’의 중심적 자리매김을 늘 그 전개 목적으로 삼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동시에 ‘민족’과 무관하거나 ‘민족’을 초월했던 부분들은 배제되고 만다. 예컨대 조선말기에 팔도 기층민중의 문화나 언어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았다. 충남 천안 출신인 조병옥(1894~1960)이 1911년에 평양숭실학교로 유학 갔을 때 이북 지방의 언어를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전통시대 말기의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 국가의식이 비교적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한 의병장 이인영(1867~1909)이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의병 진영을 떠나 낙향했다는 것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 만큼 가족 윤리는 국가윤리에 우선되기도 했다.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이었는데, 조선 왕조의 멸망으로 성리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유교적 ‘문약’(文弱)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규탄 대상에 오르자 성리학의 대체물로서 ‘부강’(富强)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 민족주의가 성리학이 비워준 자리를 메운 것이 민족주의 위력의 근원이 됐다. 일제 식민화의 충격이 저항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위치를 굳히게 했다는 것은 맞지만, 민족주의적 저항 운동 이외에도 민족 문제 해결과 계급적 혁명 노선을 병행하려 했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세력들이 식민지 시기 해방 전선의 주축을 맡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국내에서 ‘국제 노선’을 지켜온 공산주의 계열 투사들이 1946년부터 이남에서, 그리고 1953년부터 이북에서 각각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기에 우리가 지금처럼 저항 담론으로서 민족주의의 위치를 과장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분단 극복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도 맞지만, 과연 1990년까지는 옛 소련, 그 뒤에는 중국의 지원으로 경제를 꾸려온 이북의 지배계급이나, 금융·기술·수출·시장·문화자본 그리고 석유공급의 안정성 등의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에 여전히 의존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남의 지배계급이 진정한 분단 극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계급 갈등이 해결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북한 양쪽의 민중에게 유리한 통일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이다. 보통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서는 이들을 공격할 때에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그러면, 대안이 무엇이냐, 민족이 용도폐기되면 진보의 구심점이 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곤 한다. 필자로서는 그 답이 분명하다.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차적 모순과 분단의 이차적 모순 극복에 가장 도움이 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의 ‘커다란 착취공장’으로 떠오르는 광역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들을 집중적으로 내포한다. 삼성이나 도요타의 중국·동남아 저임금 노동력 착취, 남한이나 중국에서 ‘정규직 노동’의 치명적 위기, 이민 노동자의 살인적 수탈, 황사처럼 국경을 모르는 환경 인재(人災)들…. 이 문제들의 해결에는 ‘민족’이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북-미 관계, 남-북 관계가 계속 개선돼 남한 등 외래 자본이 이북으로 대량으로 침투돼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한층 거대하게 벌인다면 ‘분단’과 ‘통일’ 사이의 모순이 결국 ‘남·북한의 피해 대중’과 ‘남·북한 지배자 연합’ 사이의 모순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15~20년 만에 현대와 삼성이 평양 주위에 공장을 세워 이북 노동자들에게 10만원 이하의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북한 권력자들의 대리인들이 남한에서 은행계좌를 열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는 시대는 얼마든지 도래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착취자들이 하나가 되는 상황에 대비해서 남한 민중을 대변한다는 진보도 ‘남·북한 경협’에 대한 무비판적인 민족주의적 환희심을 버리고 북한 민중과의 연대, 공동의 계급 투쟁을 벌일 자세를 곧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두고 벌이는 논쟁 소리가 요란하지만, 해답은 이미 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2007년10월18일치 〈한겨레〉에서 ‘하나로 뭉치니 마음은 하나, 힘은 두배’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는가? 이 기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하나의 노조를 만들어 ‘국내외 출신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라는 중요한 양보를 쟁취한 대구의 삼우정밀이라는 부품업체를 다룬다.
피부색과 온갖 편견들을 넘어선 자본 피해자들의 연대, 이것이야말로 모든 노동자가 평화롭게 같이 잘살 수 있게 해주는,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 교수는 가야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등 처음에는 주로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했지만, 최근에는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우승열패의 신화〉 (2005) 등이 있습니다.
최근 학계나 진보 운동계 일각에서 ‘탈민족’의 조류가 감지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민족’만큼 신성화돼 있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국민’/‘민족’ 담론에 호소하는 일이야 어디를 가나 흔하지만, 한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 양쪽은 아직까지도 ‘민족’에 대한 일종의 충성 경쟁을 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지난달 필자가 평소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은 개천절을 맞이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평을 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으로 이 땅 위에 나라를 세운 지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 하늘은 아직 다 열리지 않았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돌을 놓으시고 우리가 열어야 하는 하늘이다. 민주노동당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홍익의 정신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 나가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을 다짐한다.” ‘반만년의 역사’와 ‘단군 할아버지’의 역사성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계급 모순을 부정하는 ‘홍익’과 같은 수사를 노동계급의 정당이 이용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 현실 그대로다. 1993년부터 단군을 실재 인물로 선전함으로써 과학적 근대 사학 자체를 폐기했다 싶은 이북(북한)과 달리 적어도 이남(남한)의 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신화와 역사를 구분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배워야 할 만큼 ‘민족’의 신화는 여전히 사회 일반에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발원지인 유럽에서 이미 우파의 구시대적 전유물로 전락해버린 ‘민족’ 담론이 한국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한국에서의 ‘민족’의 불로불사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기도 전에 이미 고려·조선 왕조에 의해 천여 년 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운영돼 왔다. 그만큼 어느 전근대 사회보다 국가의식과 내부 동일성이 높았다. 거기에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가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자기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 담론은 사회의 통념이 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계에서 동질성이 가장 높은 민족인 우리를 미·소 양국이 강제로 분단시켰으니 자연히 분단 극복 지향의 민족주의 담론이 진보적 사고의 중추로 굳어졌다.” 이런 설명은 꼭 틀리지는 않지만 오늘과 같은 ‘민족’의 위력을 과거에 무비판적으로 투영시킴으로써 한국 역사가 마치 ‘민족’의 중심적 자리매김을 늘 그 전개 목적으로 삼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동시에 ‘민족’과 무관하거나 ‘민족’을 초월했던 부분들은 배제되고 만다. 예컨대 조선말기에 팔도 기층민중의 문화나 언어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았다. 충남 천안 출신인 조병옥(1894~1960)이 1911년에 평양숭실학교로 유학 갔을 때 이북 지방의 언어를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전통시대 말기의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 국가의식이 비교적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한 의병장 이인영(1867~1909)이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의병 진영을 떠나 낙향했다는 것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 만큼 가족 윤리는 국가윤리에 우선되기도 했다.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이었는데, 조선 왕조의 멸망으로 성리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유교적 ‘문약’(文弱)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규탄 대상에 오르자 성리학의 대체물로서 ‘부강’(富强)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 민족주의가 성리학이 비워준 자리를 메운 것이 민족주의 위력의 근원이 됐다. 일제 식민화의 충격이 저항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위치를 굳히게 했다는 것은 맞지만, 민족주의적 저항 운동 이외에도 민족 문제 해결과 계급적 혁명 노선을 병행하려 했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세력들이 식민지 시기 해방 전선의 주축을 맡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국내에서 ‘국제 노선’을 지켜온 공산주의 계열 투사들이 1946년부터 이남에서, 그리고 1953년부터 이북에서 각각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기에 우리가 지금처럼 저항 담론으로서 민족주의의 위치를 과장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분단 극복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도 맞지만, 과연 1990년까지는 옛 소련, 그 뒤에는 중국의 지원으로 경제를 꾸려온 이북의 지배계급이나, 금융·기술·수출·시장·문화자본 그리고 석유공급의 안정성 등의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에 여전히 의존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남의 지배계급이 진정한 분단 극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계급 갈등이 해결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북한 양쪽의 민중에게 유리한 통일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이다. 보통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서는 이들을 공격할 때에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그러면, 대안이 무엇이냐, 민족이 용도폐기되면 진보의 구심점이 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곤 한다. 필자로서는 그 답이 분명하다.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차적 모순과 분단의 이차적 모순 극복에 가장 도움이 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의 ‘커다란 착취공장’으로 떠오르는 광역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들을 집중적으로 내포한다. 삼성이나 도요타의 중국·동남아 저임금 노동력 착취, 남한이나 중국에서 ‘정규직 노동’의 치명적 위기, 이민 노동자의 살인적 수탈, 황사처럼 국경을 모르는 환경 인재(人災)들…. 이 문제들의 해결에는 ‘민족’이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북-미 관계, 남-북 관계가 계속 개선돼 남한 등 외래 자본이 이북으로 대량으로 침투돼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한층 거대하게 벌인다면 ‘분단’과 ‘통일’ 사이의 모순이 결국 ‘남·북한의 피해 대중’과 ‘남·북한 지배자 연합’ 사이의 모순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15~20년 만에 현대와 삼성이 평양 주위에 공장을 세워 이북 노동자들에게 10만원 이하의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북한 권력자들의 대리인들이 남한에서 은행계좌를 열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는 시대는 얼마든지 도래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착취자들이 하나가 되는 상황에 대비해서 남한 민중을 대변한다는 진보도 ‘남·북한 경협’에 대한 무비판적인 민족주의적 환희심을 버리고 북한 민중과의 연대, 공동의 계급 투쟁을 벌일 자세를 곧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두고 벌이는 논쟁 소리가 요란하지만, 해답은 이미 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2007년10월18일치 〈한겨레〉에서 ‘하나로 뭉치니 마음은 하나, 힘은 두배’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는가? 이 기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하나의 노조를 만들어 ‘국내외 출신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라는 중요한 양보를 쟁취한 대구의 삼우정밀이라는 부품업체를 다룬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박노자교수
박노자 교수는 가야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등 처음에는 주로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했지만, 최근에는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우승열패의 신화〉 (200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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