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20세기 말 한류의 시작을 지켜본 한 원로 드라마 피디의 진단이다.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고, 한국 문화가 담기고, 한국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최근 전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도드라지고 있어서다. 방탄소년단(BTS)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넷플릭스) 이후 한국에 대한 관심이 각국에서 자발적으로 ‘한국’을 열쇳말 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 자체가 대중적으로 통하는 주요 소재가 됐고, 한국 관련 이야기가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이전 한류 시대와 다르다”고 말했다.
에이치비오맥스가 ‘한국’ 소재로 만든 브라질 드라마 <옷장 너머로>. 에이치비오맥스 제공
■ ‘한국’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그들’ 속 ‘우리’의 존재가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엑스오, 키티>(넷플릭스)처럼 한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미국 하이틴 드라마가 나오고, 영화 <에밀리 더 크리미널>처럼 주인공 룸메이트로 한국인 남녀가 등장해 그저 소파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난 사람들>(넷플릭스)에서 한국 이민자들은 이제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은 이 시대 보편적 감정인 ‘분노’를 둘러싼 복합적인 마음을 이야기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인을 대상화해 이질적인 존재로 바라보던 몇년 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엑스오, 키티>는 공개하자마자 미국·영국 등 영어권을 포함해 60여개국에서 1위에 올랐다.
“우리를 좋아해서 우리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들었다.” 최근 방탄소년단 데뷔 10주년 행사에서 알엠(RM)은 이렇게 말했다. 특정 연예인에게서 시작된 관심이 언어·문화 등의 궁금증으로 확산하는 건 자연스럽다.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시도도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미국 에이치비오(HBO) 맥스가 다음달 20일 공개하는 브라질 오리지널 드라마 <옷장 너머로>는 10대 소녀가 신비로운 포털을 통해 케이팝 스타와 만나는 로맨틱 판타지 장르다. 이 드라마에는 한국 보이그룹 뉴키드의 진권·이민욱이 출연한다. 뉴키드 소속사 관계자는 “에이치비오 맥스가 남미 시장을 확장하는 데 한국 케이(K)팝을 활용한 콘텐츠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민영은 소속사가 없던 시절 SNS 오디션 공지를 보고 직접 지원해 미드 <엑스오, 키티> 주인공이 됐다.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 케이스타, 세계에서 시작한다
지난해 11월 데뷔한 4인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는 한국 음악 순위보다 미국 ‘빌보드’에 먼저 등장했다. 이제 한국 연예인은 시작부터 전세계인과 경쟁한다. 지금껏 <이터널스>(2021)의 마동석이나 <더 마블스>(개봉 예정)의 박서준 등은 국내 인기가 외국 활동의 바탕이 됐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세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엑스오, 키티>의 남자 주인공을 맡은 최민영은 인스타그램 공지를 보고 프로필과 영상을 보내 오디션을 봤다. 최민영은 “할리우드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줌으로 여러차례 오디션을 봤다”고 말했다. 진권과 이민욱도 직접 지원해 3개월간 오디션을 보고 <옷장 너머로>에 캐스팅됐다. 이런 오디션을 여러차례 경험한 한 신인배우는 “오티티(OTT) 시대와 맞물려 전세계에서 오디션 볼 기회가 훨씬 많아졌다”며 “특히 외국 작품은 한국 배우·가수까지 지원해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고 했다.
외국 작품은 국내 인기와 관계없이 선택받을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섭외 대상이 ‘한국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지 못해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최민영은 “8살 때 캐나다에서 1년 정도 산 것이 도움은 됐지만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다”며 “아시아계 사람들이 주변 인물로 소모되는 게 아니라 메인 줄기를 잡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품이어서 영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제작사가 미국 배우들과 만든 미드 <빅 도어 프라이즈>.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 전방위로 확산하는 케이 마크
외국 제작사와의 공동 작업도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애플티브이플러스에서 지난 3월 공개한 10부작 미국 드라마 <더 빅 도어 프라이즈>는 국내 스튜디오드래곤과 미국 스카이댄스가 공동 제작했고 미국 배우들이 출연한다. 호평 속에 최근 시즌2 제작도 확정됐다. 일본 프라임 비디오에서 최근 방송을 시작한 <시 히어 러브>도 한국 스태프가 작업하고 일본 배우들이 출연한, 한·일 합작품이다. 한국 창작자를 직접 영입하기도 한다. 미국 유명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는 지난해 이명우 피디와 계약하고, 한국계 미국인의 음악적인 삶을 다룬 이야기를 준비했다.
한류의 영역은 점차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핀오프(기존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 뮤지컬 <앤줄리엣>에는 한국 배우 황주민이 여러 역할을 맡는 ‘멀티’와 주연의 ‘언더스터디’(주연 부재 시 대역)로 무대에 섰다. 영화나 드라마에 견줘 아직 동양인에게 보수적인 뮤지컬 분야에서, 한국 국적 배우 중 최초로 아시아인 역할이 아닌 주연을 맡은 것이다. 황주민은 마블 드라마 시리즈 <아이언 피스트 시즌2>의 해치맨을 연기했고 영화 <헤일 메리> 등에도 출연했다. 윤석진 교수는 “유튜브, 오티티 등으로 문화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한국 콘텐츠가 여러 영역에서 시너지를 내며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