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는 여성을 남성이 안아주는 등 케이(K)드라마의 법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16년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월드>(왼쪽)와 최근 인기가 높은 넷플릭스 시리즈 <엑스오, 키티>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차용했다.(오른쪽) 넷플릭스 제공
길을 걷다가 혹은 높은 곳에서 뭔가를 꺼내려다가 균형을 잃었다면? “어, 어, 어” 하며 휘청대다가 넘어져 ‘코’가 깨질 수도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다 이뤄지는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반드시 누군가 나타나 받쳐준다. 요즘은 남녀가 바뀌기도 하지만, 대부분 넘어지는 건 여자고 팔로 감싸 안아주는 건 남자다. 드라마에서 남녀가 서로 혹은 일방적으로 반하는 설정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너무 자주 등장하니까 아예 ‘케이(K) 드라마의 법칙’처럼 여겨진다. <홍천기>(SBS)에도 나오고 심지어 남장 여자 이야기 <연모>(KBS2)에도 등장하는 등 역사가 꽤 깊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국내 서비스 초창기 시절인 2016년 한·중·일 합작으로 나온 <드라마월드>는 이런 한국 드라마 클리셰(자주 등장하는 장면)를 소재로 만들었다. ‘클레어’가 스마트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다. 조력자 ‘세스’와 한국 드라마 법칙을 활용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그들이 말하는 설정은 이렇다. 여자가 넘어지거나 기절하면 남자가 받아줘야 한다거나, 남자 주인공은 재벌이어야 하고 여자 주인공은 가난하고 착하다. 그래서 둘 사이를 갈라놓는 남주의 약혼녀와 엄마가 등장한다. 남주의 샤워신은 필수이고, 간접광고(PPL)도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아침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이른바 ‘김치 싸대기’ 장면도 나왔다.
한국 드라마 법칙만 모아도 시리즈 한편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뻔한 설정을 자주 사용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전세계에 공개되는 드라마 출연 기회가 드물어서인지 작품성과 관계없이 톱스타들이 연이어 특별출연했다. 시즌1에는 한지민 최시원 등이, 2021년 한-미 합작으로 만든 시즌2에는 이정재 하지원 등이 나왔다. 한국 시청자들조차 “저런 장면이 또 나와?”라며 진부하다고 비판하던 부분들을 외국인들이 알아차렸다는 것에 콘텐츠 제작자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국 드라마에 얼마나 자주 나왔으면, 외국인의 시선에서 법칙처럼 느껴질까? 콘텐츠 제작자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각 방송사 제공
7년이 지난 2023년, 외국인이 보는 한국 드라마 법칙은 사라졌을까? 사라졌겠지! <오징어 게임>이 미국에서 권위 있는 텔레비전 시상식인 ‘에미상’에서 6관왕을 휩쓸었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우리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지난 18일 넷플릭스가 공개한 미국 드라마 <엑스오(XO), 키티>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한국계인 미국인 ‘키티’가 한국에 와서 국제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미국 하이틴물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주인공이고, 한국이 배경인 작품이 등장했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외국인이 보는 한국 드라마의 성공 법칙은 그대로다.
이 드라마도 <드라마월드> 속 ‘클레어’와 ‘세스’가 주장하던 방식을 따른다. ‘키티’(애나 캐스카트)가 뒤로 넘어지려고 하자 남자 주인공 ‘대’(최민영)가 안아준다. ‘본의 아니게’ 키티와 대의 사랑을 방해하는 재벌 딸이 등장한다. 전세계 호텔 300개를 가진 유리(지아 킴)의 부모는 딸이 자기 집 운전기사의 아들 대와 교제하는 걸 반대한다. 또 키티는 학교 직원의 착오로 남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몰래 생활하게 된다. 여러 인물들을 납득은 안 가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곳에 몰아넣어 여러 사건이 벌어지게 하는 것 또한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하는 법칙이다. 남자 출연진 중 한명이 상의를 벗고 등장하는 장면도 있고, 결정적으로 출생의 비밀이 큰 축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월드>도 <엑스오, 키티>도 한국계 미국인이 참여했다. 둘 다 한국 콘텐츠가 관심받는 분위기를 반영하고, 또 더 많이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했을 것이다. 실제로 사랑받고 있다. <엑스오, 키티>는 공개 7일 만인 25일(현지시각) 전세계 47개국에서 1위다. <드라마월드> 때와 견줘 반응이 훨씬 좋다. 그런데 왜 기분은 더 씁쓸한 걸까. <엑스오, 키티>는 한국을 사랑하는 시선이 더 느껴지는데,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성공한 이유는 이런 설정들 때문이고, 또 한국에서는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아서다. 왜! 케이드라마가 열풍이라는데 법칙은 변하지 않는 걸까? 혹시 외국에서 좋아한다고 비슷한 설정을 그대로 유지해와서는 아닐까? 아니면 오티티 자본에 외형 키우는 데 신경 쓰느라 중요한 이야기를 다지는 건 소홀히 해서 인상적인 케이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뭐가 됐든, 이제 이야기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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