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에스엠 전 총괄프로듀서(왼쪽)와 방시혁 하이브 의장. 에스엠엔터테인먼트·하이브 제공
하이브가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이하 에스엠)를 인수하기로 한 결정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글로벌 엔터 시장에서 케이(K)팝 바람을 이끌어온 두 초대형 기획사가 하나로 뭉치는 건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초유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협지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번 사태를 두고 궁금한 것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 배경과 맥락을 짚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은 에스엠 창립자이자 대주주인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케이팝 시스템의 초석을 놓고 흐름을 선도해온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는 2020년 이후 또 한번의 독특한 시도를 합니다. 4세대 걸그룹 에스파를 내세워 케이팝에 메타버스 세계관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에스엠시유(SMCU·SM CULTURE UNIVERSE)라는 이름도 붙였습니다. 대중의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색다른 도전임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큰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자신의 지분을 다른 회사에 넘기는 방식으로 확장을 시도한 것입니다. 케이팝 산업은 이제 단순히 음반과 공연에만 기대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아이피(IP·지식재산권)를 활용해 다양한 형태의 플랫폼과 콘텐츠로 확장해야 수익과 영향력이 극대화됩니다. 하이브가 방탄소년단(BTS) 아이피를 활용해 영상, 웹툰, 웹소설, 게임 등을 만들거나 아예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도시 전체를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한 게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러려면 영향력 있는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하이브는 네이버와 협업했습니다. 에스엠이 네이버 이외에 막강한 플랫폼을 갖춘 카카오, 씨제이이엔엠(CJ ENM) 등과 인수 협상을 벌인 이유입니다.
장기간 협상을 거치면서 이 전 총괄프로듀서와 특정 회사가 도장 찍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막판에 틀어졌고,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러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에스엠이 지난 3일 이 전 총괄프로듀서 퇴진을 명시한 ‘에스엠 3.0’ 비전을 발표한 데 이어, 7일 카카오가 에스엠 지분 9.05%를 확보하며 2대 주주가 된다고 공시한 것입니다. 이 전 총괄프로듀서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자신은 완전히 배제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스엠 현 경영진인 이성수·탁영준 공동대표와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하 얼라인)이 손잡고 주도한 것입니다. 얼라인은 회사의 문제점을 개선함으로써 주주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입니다. 얼라인은 지난해 초부터 에스엠에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 총괄프로듀서의 개인회사 라이크기획이 프로듀싱 수수료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챙겨, 주주와 회사의 가치를 훼손해왔다는 것입니다. 일견 타당한 문제 제기였고, 결국 라이크기획과 에스엠은 지난해 말 계약을 조기 종료했습니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라인과 에스엠 현 경영진은 카카오를 끌어들이며 에스엠 지배구조 개선에 나섰습니다. 애초 카카오는 이 전 총괄프로듀서의 협상 상대였습니다. 그 협상이 깨진 뒤 우회로를 통해 에스엠을 파고들어 온 것입니다. 그 결과가 ‘에스엠 3.0’입니다. 에스엠 현 경영진은 1명에 의존하는 기존 체제에서 멀티 프로듀싱 체제로 개선하기 위한 조처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전 총괄프로듀서로선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듯 물러나는 모양새가 결코 내키지 않았을 겁니다. 배신감도 컸다고 합니다.
결국 이 전 총괄프로듀서는 반격의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자신의 지분 14.8%를 전격적으로 하이브에 넘기기로 한 것입니다. 경쟁사인 하이브는 애초 협상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이 전 총괄프로듀서가 내민 손을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잡은 것입니다. 하이브 쪽 얘기를 들어보면, 이 전 총괄프로듀서는 인수합병 뒤에도 에스엠 프로듀싱과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지배구조 개선에도 합의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물러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기보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명예로운 퇴진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방 의장은 이번 인수 과정에서 이 전 총괄프로듀서에 대한 존경심과 그동안 추구해온 방향을 이어갈 뜻을 밝혔습니다. 하이브 산하 빅히트뮤직, 쏘스뮤직, 어도어 등처럼 멀티 레이블 체제를 통해 에스엠의 독립적 운영과 색깔 보장도 약속했습니다.
하이브가 에스엠 인수로 기대하는 건 다양한 케이팝 아이피를 보유함으로써 규모의 플랫폼 경제를 이루고 세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이브의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에스엠 가수들이 들어온다면 글로벌 영향력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하이브 관계자는 “토종 플랫폼 위버스를 틱톡 못지않은 글로벌 앱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전했습니다. 몸집을 불림으로써 세계 음악 시장 내 목소리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그래미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데는 미국 음악산업 내 영향력이 약한 점도 작용했습니다. 하이브가 국내 1위라고는 해도 소니·유니버설·워너뮤직 등 글로벌 메이저 레이블과 비교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에스엠과 합치면 힘이 좀 더 생기지 않을까 기대할 따름입니다. 케이팝을 바탕으로 한 다른 비즈니스 확장에도 시너지 효과를 내는 건 물론입니다.
국내 엔터 업계에선 이런 협업·대형화 전략이 이전부터 진행돼왔습니다. 네이버와 하이브, 와이지(YG)는 진작부터 손을 잡았습니다. 이제 카카오, 씨제이, 제이와이피(JYP) 등 다른 회사들이 어떤 전략을 세울지도 관심을 모읍니다. 한쪽에선 하이브와 에스엠의 독과점에 대한 우려도 나옵니다. 너무 거대해져서 소비자나 다른 중소업체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경계해야 합니다. 다만 지금의 케이팝 산업이 내수보다 글로벌 시장을 주 무대로 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번 인수합병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좀 더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