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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송해, ‘가로수를 누비며’ ‘전국노래자랑’ 67년 잘 다녔소이다

등록 2022-06-10 07:00수정 2022-06-10 16:03

1955년 29살 악극단 데뷔부터
지난 5월 95살 마지막 행사까지
사진과 어록으로 돌아보는 송해의 예술 인생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마지막 진행 모습. 한국방송 제공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마지막 진행 모습. 한국방송 제공

지난 8일 세상을 떠난 송해의 삶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사를 관통한다. 그는 연예인들이 순회 악단에서 공연하던 1955년, 29살에 창공악극단에 입단해 희극인의 삶을 시작했다. 노래로 시작했지만 연기, 진행도 선보이는 등 다재다능한 재주를 뽐냈다. 1960년대부터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에서 방송으로 이동한 뒤, 그도 활동 무대를 티브이와 라디오로 옮겼다. 1964년 <동양방송>(TBC) 개국 이후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문화방송>(MBC)과 전속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송해’라는 이름값이 두둑해지기 시작했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등과 함께 코미디를 선보였고, 박시명과 콤비 연기로 인기를 얻었다. 티브이 시대가 본격화된 건 1970년대 후반부터다.

<동양방송>의 전신인 <알에스비(RSB) 라디오서울> 개국 이후에는 오랫동안 디제이로도 살았다. 1975년부터 17년간 택시운전사들을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했다. 방송 제작 시스템이 스튜디오 중심을 벗어나는 시도가 잦아지면서 그도 거리로 나선다. 1980년 시작한 공개녹화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넘겨받아 1988년 5월 ‘경북 성주’편부터 진행했다. 34년 동안 아파서 쉰 6개월을 제외하고는 매주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 노래자랑~”을 외쳤다. 지난 4월에는 ‘최고령 티브이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오르며 자신만의 새 역사도 남겼다. 코미디언 김병만은 송해를 두고 “코미디라는 왕국의 리더, 존재만으로 희극인들을 이어주는 중심”이라고 말했다. 송해는 떠났어도 그가 보여준 푸근한 미소와 그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하나에 지난 67년(예능인 기준)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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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노래잔치>

KTV 유튜브 프로그램 갈무리
KTV 유튜브 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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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 봄놀이 홍보 영상

“가끔 소풍 길에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있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nbsp;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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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 <쇼쇼쇼>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nbsp;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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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모기약 광고

오비에스 제공
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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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고전 유머극장>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nbsp;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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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 <가로수를 누비며>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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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전국노래자랑> 1회

<전국노래자랑>은 1971년 <케이비에스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이 전신이다. 1980년부터 이름을 <전국노래자랑>으로 바꿨고, 프로그램 성격도 가수를 뽑는 경연에서 지금의 지역 잔치 같은 성격이 강해졌다. 송해는 최선규 아나운서, 가수 위키리, 방송인 이상용 등에 이어 1988년 5월부터 <전국 노래자랑> 진행을 맡아 34년간 ‘일요일의 남자’로 살았다. “한 3년간은 감을 잡으려고 노력했다”는데 푸근한 인상과 구수한 입담으로 빠르게 ‘송해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느껴질 정도”(김희선)로 정겨운 것이 비결 중 하나. 그가 이 프로그램에 녹아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친근함을 더한다. 그는 평소에 “<전국노래자랑>은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교과서처럼 느껴진다. 누가 잘하고 못 하고 꼭 재밌어야 하는 것보다 그저 우리 생활이 묻어나는 곳 같다”고 말했다. 우리 생활, 서민 내음을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그는 녹화 전날 촬영지에 내려가 목욕탕이나 식당에서 주민들과 어울리며 미리 정을 쌓았다. 촬영지 관련 책을 읽고 맛집부터 특산품까지 정보를 파악해두는 건 기본이었다. 그가 34년간 단 6개월을 제외하고 자리를 지키며 지구 10바퀴가 넘는 거리를 누비며 전국에서 1천만명을 만나 “사람을 많이 아는 부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일요일의 알람은 34년간 계속됐다. “전구욱~ 노래자랑~~”

1988년 첫 진행.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1988년 첫 진행. 한국방송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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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전국노래자랑>

2001년. 한국방송 제공
2001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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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상 소감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

2005년 일본편. 한국방송 제공
2005년 일본편.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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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 곡 ‘나팔꽃 인생’ 발표 간담회

성악 공부를 한 그는 지금껏 음반 12장을 발매하고 2011년에 전국 순회 첫 단독 콘서트도 열었다. 노래방에 가면 혼자서 40~50분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즐겨 부르는 노래도 많았다고 한다. 1942년 나온 ‘고향설’ 등등. 올해 1월 <한국방송>이 설특집으로 방송한 트로트 뮤지컬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서 후배들과 함께 ‘내 인생 딩동댕’을 부르는 장면이 뜻깊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는 영화 <신세 좀 지자고요> 등에 출연하는 등 연기도 꽤 했다. 배우 이순재는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인”이라고 표현했다.

“나팔꽃은 아침에 환하게 피었다 오후에 지고 다음 날 다시 밝게 피는, 제 인생과 비슷한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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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기분 좋은 날>

“오토바이를 좋아하던 아들이 나 몰래 엄마를 졸라 오토바이를 샀어요. 한남대교를 지나다 빗길에 엎어지는 사고를 당했어요.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채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갔어요. 그게 아들의 마지막이었어요. 뒤늦게 전해 들으니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가며 한 마지막 말이 ‘아버지, 살려줘'였다고 해요.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낭떠러지로 가 뛰어내렸지만 하늘이 아들이 도왔는지 소나무에 걸렸어요. 여전히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은 지울 수 없지만 아내와 다른 가족들 생각에 힘든 시기를 버텨냈어요. 하지만 아직도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어요.”

2009년. 프로그램 갈무리&nbsp;
2009년. 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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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전국노래자랑> 중국 선양편

“한국에 나와서 일하는 조선족 동포들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2009년. 한국방송 제공&nbsp;
2009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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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고 배삼룡 영결식

“형님이 왜 바보냐. 저 뒤를 돌아봐라. 똑똑하고 영특한 후배들이 아픔을 달래고 있다…천국에서 웃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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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전국노래자랑> 30돌 간담회

“기회도 중요하고 운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중요하다. 열심히 하는 자가 후임 엠시(MC)가 될 것이다.”

"누구나 당연히 ‘땡’보다는 ‘딩동댕’을 좋아한다. 하지만 땡을 맞아보지 않으면 딩동댕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땡이 세 번 맞으면 바로 딩동댕이 되는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늘 내 인생이 딩동댕이라는 것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했다.”

2010년. 한국방송 제공
2010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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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56년만 첫 단독 공연 간담회

“과거의 대중가요를 소개할 때 흘러간 노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됐어요. 흘러가지 않았어요. 지금도 부르고 있지 않나. 그리운 노래, 불러보고 싶은 노래, 들어보고 싶은 노래라고 해야 합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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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전국노래자랑> 결산

2013년. 한국방송 제공
2013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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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인간의 조건>

“과거 코미디언들은 사람을 웃기는 비상한 실력을 가졌는데도 장르가 코미디라는 이유로 괄시받았어… 그러니까 너희(후배 코미디언들에게)가 정말 참다운 주인이 되어서 앞으로 100년 후의 유산이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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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밥상의 신>

“내 건강 비결은 BMW다. B는 버스(BUS) M은(METRO) W는 워킹(WALKING)을 한다는 뜻이다”

2014년. 프로그램 갈무리
2014년. 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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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나 데리러 오거든~ 우리 후배들 활동하는 것 다 보고 가야 하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여라~.”

2015. 한국방송 제공&nbsp;
2015.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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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전국노래자랑>

나는 평생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얻은 경험, 그것을 통해 배운 것을 가지고 즐기면서 살겁니다.”

2019년. 한국방송 제공&nbsp;
2019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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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전국노래자랑 스페셜>

2020년. 한국방송 제공
2020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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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영화 <송해 1927>

“같은 무대에 100번 나오면 100번을 긴장한다. 관객이 단 한명이 있어도 1만명이 있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2022년. 영화사 제공
2022년. 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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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전국노래자랑 마지막 진행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을 편히 대할 수 있는 능력이요? 그분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마음이면 만사형통이죠.”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저 역시 늘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다.”

“희극을 하려면 정극을 알아야 해요. 비극도 알아야 하고.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기쁨을 알겠어요. 바닥부터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할 텐데 다들 너무 급해요.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고, 번쩍하면 스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해요. 그 계산서가 나중에 다 온다는 걸 모르고 말이에요.”

2021년. 한국방송 제공
2021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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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5월23일 마지막 공식 행사 <기네스 세계기록 등재> 시상식

“우리(전국노래자랑)는 경쟁 없이 결론이 나오는 ‘다정함’이 있습니다.”

2022년 5월 23일. 한국방송 제공
2022년 5월 23일. 한국방송 제공

그리고 그가 지난해 발간한 <송해 1927>에는 하루를 사는 데 힘이 되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고 내 운명이고 내 팔자이니,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해요.” - <송해 1927>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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