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⑬ 자연과 여성
자연-여성 관계 복원으로 지속가능 추구하는 에코페미니즘
지구환경 살릴 과학기술은 경쟁과 지배 대신 돌봄 전략으로
자연-여성 관계 복원으로 지속가능 추구하는 에코페미니즘
지구환경 살릴 과학기술은 경쟁과 지배 대신 돌봄 전략으로
1990년대 국제사회에 수용된 에코페미니즘 물결은 1999년 에코페미니즘을 지향하는 한국 최초의 환경단체 ‘여성환경연대’ 설립으로 이어졌다. 국내 에코페미니즘 담론 생성과 교육 활동을 실천 중인 이 단체는 2017년 국내 생리대 유해 물질 조사 결과를 발표해 생리대 안전성 및 여성 건강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여성환경연대 활동가들이 면생리대를 만드는 모습. 여성환경연대 제공
에코페미니즘, 자연과 여성을 연결하다 한때 숭배와 경외의 대상인 여신으로 칭송받던 자연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된다. 한편 가부장제 사회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 돌봄 등의 노동을 강요해왔다. 가이아 이론이 발표된 때와 비슷한 시기, 프랑스 페미니스트 프랑수아즈 도본은 자연과 여성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 <페미니즘 혹은 죽음>이라는 책을 펴냈다. 자연과 여성에 대한 과도한 착취가 인구 과밀과 생태계 파괴라는 이중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이 책에서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한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맨 처음 사용됐다. 미국 환경사학자 캐럴린 머천트는 여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분석을 더했다. 1980년 출간된 머천트의 저서 <자연의 죽음>은 유럽의 자본주의와 근대 과학이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자연과 여성을 도구화하고 지배해온 역사를 추적한다. 근대 과학은 자연을 유기체가 아닌 기계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제공했다. 자연이 자연에 내재한 힘이 아닌 외부 요소에 의해 작동된다는 관점은 자연을 수동적인 물질로 간주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어떤 작동 원리에 따라 파악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심어준 그릇된 믿음은 무분별한 자연 개발을 정당화하고 유럽의 자본주의를 살찌우는 원천이었다. 머천트는 특히 이러한 ‘자연의 죽음’이 ‘여성의 죽음’을 동반해 진행됐다고 보았다. 근대 과학이 싹트던 16~17세기 유럽에서 과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실험이라는 방법론을 내세워 자연을 분석하고 조작했다. 이때 산과 땅을 파헤치고 광석을 캐내는 산업은 자연을 강간하거나 지구의 자궁을 오염시키는 행위에 비유됐다. 과학이 출현한 시기는 여성 수만명이 마녀재판으로 처형당한 때와도 겹친다. 자연이 과학의 이름으로 취조당했듯 수많은 여성이 동물과 교감하거나 직접 약초를 만들어 병을 치료했다는 죄목으로 고문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자연과 여성에 대한 유구한 착취의 역사는 인류와 지구를 되살릴 잠재력이 여성에게 있음을 뒷받침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빼앗기고 단절된 상태였던 자연과 여성의 풍부한 관계를 복원한다면 여성이야말로 자연을 더 잘 관리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의 주장은 실제 20세기 말 환경 문제의 해결책으로 수용됐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지구 환경 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을 논의하는 세계 정상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결과물인 ‘리우 선언’은 환경과 개발에 대한 27개 기본 원칙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스무번째로 “여성이 환경관리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이는 에코페미니즘이 남긴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_______
자연과 여성을 되살리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에코페미니즘에는 여성에게 자연을 돌보는 역할을 주어 전통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의 모성은 서구 가부장제 자본주의가 기대하는 모성과 같지 않다. 인도 물리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와 독일 사회학자 마리아 미스는 인도 여성의 현실에 주목해 여성과 자연이 자본주의의 착취에 함께 대응하는 길을 찾는다. 인도 여성들은 서구 벌목 기업보다 훨씬 오랜 기간 숲을 보존하며 나무를 사용해왔다. 벌목 기업이 인도 여성의 지식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이윤을 추구하다 재난을 일으킨 숱한 사례는 인도에서 에코페미니즘이 시작된 계기로 작용했다.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어머니도, 어머니 자연도 쉽게 통제되거나 지배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과학기술을 버리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든 과학기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저히 비판한 머천트도 자연과 여성의 회복에 지역 생태 및 지역민의 삶에 맞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문제는 제1세계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는 과학기술자 집단이 제3세계 여성뿐 아니라 그들과 연결된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에코페미니즘에서도 과학기술은 중요하다. 미국 철학자 캐런 워런은 여성 및 지역의 관점과 결합한 과학기술을 중요한 에코페미니즘 실천 요소로 꼽았다. 에코페미니즘을 반영한 과학기술에는 지역 문화와 해당 지역에서의 남녀 역할, 지역 생태 등이 고려된다. 1980년대 아프리카 말라위 지역 상수도 개발 사업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말라위 지역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유엔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이 사업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 지역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말라위에서는 물을 운반하고 공급하는 일을 주로 여성이 맡는다. 따라서 이들은 마을의 남성 행정가나 서구 엔지니어보다 지역 환경과 물에 대해 더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이 지역 여성의 지식을 적극 활용하고, 이들 여성이 관리자로 훈련받아 일하게 되면서 지역민의 물 접근성과 수질이 크게 개선됐다. 상수도 개발 사업의 성공은 지역 소녀들이 매일 무거운 물동이를 지는 일에 혹사당하지 않고 학교에 나가는 등 여성의 교육 접근성이 높아지는 효과로 이어졌다. 지역 여성이 그간 축적해온 자연에 대한 지식과 노동 경험은 과학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고, 과학기술은 여성의 삶의 질과 사회경제적 위상이 향상하는 데 기여한다. 에코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은 이러한 선순환 속에서 만난다. _______
에코페미니스트 엔지니어가 지구와 인류를 구한다 최근 기후위기나 코로나19 감염병, 생물종 감소 등을 아우르는 논의에 ‘인류세’라는 용어가 종종 언급된다. 인간이 만든 지질 시대를 뜻하는 이 말은 무분별한 인간 활동으로 지구가 위기에 처했음을 강조한다.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낙진,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이산화탄소, 생태계를 파괴하는 플라스틱 폐기물 등 인류세를 대표하는 물질은 모두 서구 사회가 주도한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얼마 전인 4월22일 지구의 날, 미국 기업 테슬라의 대표 일론 머스크는 기후변화를 막는 이산화탄소 제거 기술을 개발하는 이에게 상금 1100억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앞서 머스크는 대재앙을 앞둔 인류에게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거주하자며 이른바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서구 남성 엔지니어이자 사업가가 인류세 위기를 극복할 해결책으로 다시 과학기술을 내놓은 셈이다. 그런데 과연 머스크가 내건 거액의 상금을 좇아 만들어진 기술이 인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여성과 그들의 삶터인 자연을 더 살 만하게 만들어줄까? 과연 인류세라는 전 지구적 위기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처한 문제에 눈감고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에코페미니즘의 이론과 실천은 자연과 여성, 나아가 지구와 인류가 이곳저곳 구석구석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돌보는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일깨운다. 시바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려면 경쟁과 지배 대신 돌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쟁과 지배의 전략이 인류세를 일으킨 과학기술을 낳았다면 돌봄의 전략은 지구와 인류를 살릴 과학기술을 만들 것이다. 그런 과학기술이 어떻게 가능할지 일론 머스크는 아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 괴짜 엔지니어가 아닌 에코페미니스트 엔지니어를 길러야 하는 이유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위)아프리카 상수도 개발 프로젝트에서는 더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물관리를 위해 지역 여성의 참여를 장려한다. 2015년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지역에서 추진된 참여형 프로젝트의 한 장면. 국제물관리연구소 누리집 (아래) 에코페미니즘계의 고전 <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인 세계적 사상가 반다나 시바는 1980년대부터 여성과 자연의 연대를 강조하는 국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202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미래포럼의 기조연설자로 참여해 국내 여성 환경 전문가와 기후위기 시대의 젠더 문제를 공유하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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