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⑫ 사이보그와 여성
새롭게 조명돼야 할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
핵심은 기술에 충실하면서 기술 배반하는 ‘모순의 전략’
⑫ 사이보그와 여성
새롭게 조명돼야 할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
핵심은 기술에 충실하면서 기술 배반하는 ‘모순의 전략’
인간의 몸에 기계가 결합한 사이보그는 공상과학(SF) 작품에나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이보그의 의미를 ‘기술과 결합한 생명체’로 넓게 본다면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모두 사이보그다.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의학 지식 및 기술에서 자유로운 현대인은 거의 없다.
사이보그는 여성과 현대 기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1985년, 미국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여성과 기술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사이보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과학기술의 남성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여성과 기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 글로 널리 회자됐다. 해러웨이의 선언문은 글이 발표된 지 약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양한 동기와 필요에 따라 몸을 변형하는 기술을 활용하는 21세기의 여성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은 발표 즉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었던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완전히 비틀어놓은 글이었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라는 개념은 1960년 미국 엔지니어 맨프레드 클라인스와 의사 네이선 클라인의 ‘사이보그와 우주’라는 논문에서 지구와 다른 환경에서도 생존 가능한 우주인을 뜻하는 용어로 처음 등장했다. 이후 미국에서 사이보그는 첨단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존재로 대중화됐다.
1970년대 중반에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사이보그 남성이 주인공인 텔레비전 드라마 <600만 달러의 사나이>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1970~80년대는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냉전의 도구로 개발된 과학기술에 대한 적대감과 근대성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퍼진 시기이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사이보그 선언문’의 부제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사이보그로 대변되는 20세기 후반 과학기술에 대해 열광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고, 당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후자에 속했다.
‘사이보그 선언문’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해러웨이가 냉전 과학의 산물이자 남성적 기술의 상징인 사이보그를 무조건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놀라웠다. 해러웨이는 기술이 여성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여성이 기술을 통해 해방되기도 한다는 기술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여성의 몸에 남성적 기술이 결합한 결과물인 사이보그는 순수할 수 없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바로 이 불순함이야말로 사이보그가 자신의 기원을 배신하게 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사이보그 선언문’의 핵심 단어는 ‘모순’이다. 해러웨이는 냉전에 복무하는 우주 전사를 상징한 사이보그를 기술과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의 상징으로 바꾸어 제시했고, 여성이 과학기술에 충실한 동시에 이를 배반하는 모순의 전략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략은 억압 혹은 해방의 언어로 기술되어온 여성과 기술의 경직된 관계를 전복하는 가능성을 열어줬다. 기술이 여성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여성 또한 기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은 여성에게 기술의 소비와 생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21세기 한국 여성은 20세기 사이보그 전사를 닮았다. 여성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 환경에서 생존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개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들은 타고난 몸, 주어진 몸에 맞추어 살기보다 기술의 힘을 빌려 원하는 몸을 갖는 쪽을 택한다. 전쟁 중 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군인을 위해 개발된 안면 성형수술은 이제 여성의 얼굴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술로 활용된다. 성형수술을 받는 여성은 해러웨이가 제시한 몸과 기술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이보그의 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이보그 선언문’의 메시지는 여성에게 기술을 통해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 원하는 몸을 가지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들은 그간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이 지나치게 해방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돼왔다고 지적한다. 성형수술처럼 여성의 몸에 결합하는 기술이 대중화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사이보그 선언문’은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
성형수술은 흔히 의사가 가진 전문 지식 또는 수술 기법과 동일시된다. 지하철이나 잡지의 성형외과 광고에서 수술의 효과는 수술 전후로 여성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부위마다 비교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텔레비전의 ‘메이크오버 쇼’는 성형 전 외모 편견에 시달리는 여성의 고통과 성형 후 연예인처럼 아름답게 변신한 여성의 환희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대중문화와 결합한 성형 의료 산업은 해러웨이의 선언문보다 강력한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기술을 선택해 타고난 몸에서 해방되자고 권한다.
하지만 현실의 사이보그는 선언과 선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수술이라는 기술의 실제 작동은 다른 외과 수술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수술이 이루어지려면 의사 외에도 간호 및 상담, 병원 경영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며 수술 중은 물론 수술 전후 상담 및 회복 과정에 여러 약품과 도구, 장비, 공간 등이 동원돼야 한다. 이처럼 여성이 성형수술로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에는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의학 지식 체계와 외모 지상주의 담론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물질과 지식, 노동이 개입된다.
성형수술의 실제 효과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타난다. 미용을 목적으로 하든 치료를 목적으로 하든 모든 수술은 환자가 원래 가진 몸에서 이루어진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생물학으로부터의 해방이나 기술을 향한 낙관론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몸과 결합하는 어떤 기술도 몸을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인간은 기술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기술을 선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가 될 수는 없다. 이는 사이보그가 되어가는 긴 과정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사이보그 선언문’의 핵심인 모순의 전략은 21세기 현실의 사이보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전략은 성형수술처럼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기술에 특히 필요하다. 성형수술은 선천적으로 결함 있는 신체를 재건한다는 윤리적 목적 여부에 따라 좋은 성형과 나쁜 성형으로 손쉽게 구분된다. 여성에게 높은 미의 기준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성형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동경과 비판,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작 성형수술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성형수술의 실제 효과에 대한 평가는 빠져 있다.
몸에 결합하는 기술의 진짜 효과를 확인하려면 성형수술을 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이보그가 되어본 여성들은 안다. 사이보그 이야기가 기술로 몸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몸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협상하는 이야기임을. 성형수술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삶은 광고 속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의 사이보그는 기술을 통해 변화한 몸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성형수술로 예뻐졌는지, 성형수술에 만족하는지, 성형 후의 삶이 행복한지 등은 이 관계의 결과물이지 기술 자체의 결과물은 아니다. 따라서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은 성공과 실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객관식 문제 풀이가 아닌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가는 긴 주관식 답안을 적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답안은 기술에 충실하면서 기술을 배반하는 깊은 모순의 이야기이다.
네덜란드의 과학기술학자이자 의료인류학자인 아네마리 몰은 기술의 실제 효과를 보여주는 사이보그의 이야기가 현대 기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자 더 나은 기술로 개선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에 탄생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가 몸과 기술의 결합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이었다면 21세기 사이보그는 몸과 기술의 결합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들이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이보그의 이야기와 연결된다면 우리는 언젠가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할지 모른다는 환상에도, 인간이 기술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환상에도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기술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의 상징
‘사이보그 선언문’은 1991년 출간된 단행본 <유인원, 사이보그, 여자>(왼쪽·라우틀리지 출판사)에 수록됐다. 여성주의 삽화가 린 랜돌프와 협업한 표지 그림에는 생명체와 기계, 인간과 동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교차하는 사이보그 여성 이미지가 반영됐다. ‘사이보그 선언문’은 2019년 국내에서 출간된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에서 읽을 수 있다.
21세기 사이보그, 몸과 기술의 결합
성형수술은 다른 외과 수술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식으로 몸과 결합하는 여러 도구가 상담·수술·회복의 전 과정에 걸쳐 사용된다. 지금까지 성형수술을 한 여성의 이야기는 주로 수술 후기나 성형 전후 사진이라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알려져왔다. ‘사이보그의 이야기’는 성형수술의 과정과 효과를 더욱 비판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ELLA, 한양대학교 에리카(ERICA) 교과목 ‘기계비평’ 20-2 강의록 수록 이미지.
2018년 5~12월 서울 곳곳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불법 촬영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6차까지 진행된 이 집회에는 총 30만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 결성된 ‘디지털 성폭력 아웃’(DSO)과 같은 단체에는 디지털 성폭력 근절과 피해자 지원을 위해 애쓴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기대되는 성폭력 피해자의 역할에 갇히지 않고 디지털 성폭력에 법적·기술적·문화적으로 개입해 여성과 기술의 관계를 다시 만드는 사이보그들이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해러웨이 선언문에서 사이보그들의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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