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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진화론은 여성의 적일까?

등록 2020-10-30 04:59수정 2020-10-30 10:08

진화론이 ‘생물학 결정론’에 빠지지 않도록 균형 잡아주는 페미니즘
사회적 요인과 양립하는 진화론 위해 여성은 친구이자 비판자 돼야
[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⑤진화론과 여성

진화론은 언제부터 여성과 불편한 사이가 됐을까? 진화론이 페미니즘의 비판을 대대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지 약 150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다. 2000년에 출간된 미국 진화생물학자 랜디 손힐과 인류학자 크레이그 파머의 책 <강간의 자연사>는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이유를 오로지 번식과 성욕 등 남성의 성적 동기로만 설명했다. 이들은 강간을 남녀의 사회적 위계로 설명하는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진화론 대 페미니즘의 논쟁에 불을 붙였다.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 곰베강 침팬지 보호 구역에서 관찰한 어미 침팬지 플로. 진화생물학자 세라 허디는 플로에게서 주도면밀한 전략가이자 기업가로서의 어머니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출처: 제인 구달 연구소(휴고 반 라윅 촬영)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 곰베강 침팬지 보호 구역에서 관찰한 어미 침팬지 플로. 진화생물학자 세라 허디는 플로에게서 주도면밀한 전략가이자 기업가로서의 어머니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출처: 제인 구달 연구소(휴고 반 라윅 촬영)
진화론이 강간을 성욕만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오해다

진화론으로 강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1970년대 후반에 처음 이루어졌다. 진화론자들은 암컷이 성적 파트너를 선택할 때 수컷보다 까다롭게 행동한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암컷은 자식을 낳고 기르는 데 수컷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도 했다. 포유류 암수에게서 관찰된 이러한 비대칭성은 암수의 성적 행동이 왜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데 활용됐다. 이를테면 수컷은 가임기 암컷과 얼마나 많이 성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번식 성공률이 달라지므로 여러 암컷과 무분별한 성적 행동을 한다. 반면 암컷은 좋은 유전자뿐 아니라 자식을 낳고 기르는 과정에 물적·심리적 자원이 필요하므로 이를 제공할 수 있는 수컷을 신중하게 고른다. 이와 같은 암수의 짝짓기 성향 차이 때문에 수컷은 암컷과 관계를 맺을 때 무력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강간에 대한 진화론 가설 중 하나인 ‘적응 가설’이다.

한편, 강간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부산물 가설’은 강간과 무관한 기제가 작동한 결과 그 부산물로 강간이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이 가설은 강간의 진화만을 설명하는 독립적인 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어 포유류 암수에게서 번식과 양육을 위해 성욕을 조절하는 기제가 나타난다. 이와 별개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이든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타인의 행동을 강제하려는 기제가 진화한다. 성욕을 자제하지 않고 강제로 성관계를 하려는 행위인 강간은 이 두 기제의 부산물로 발생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강간에 대한 진화론의 관점과 페미니즘의 관점은 양립할 수 없을 듯하다. 즉 강간의 생물학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는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동기가 공존할 가능성은 초기부터 존재해왔다. 가령 부산물 가설을 처음 제시한 미국 인류학자 도널드 시먼스는 성욕과 권력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권력 또한 강간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실즈와 리아 실즈는 짝짓기에 실패해 성관계 경험이 적은 남성들이 주로 강간을 한다는 기존 설명을 뒤엎고 모든 남성이 강간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번식 성공과 무관한, 분노와 적대감이라는 요소가 강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바버라 스머츠. 출처: 미시간대 누리집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바버라 스머츠. 출처: 미시간대 누리집
이와 비슷한 시기에 페미니스트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를 함께 살펴 남성의 강간에 대한 통합적인 설명을 제시하려 했다. 미국 진화론자 바버라 스머츠는 다른 영장류 사회보다 인간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애 활동, 예를 들어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는 행위 등을 더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이유가 다른 어떤 종보다 인간 남성의 연합이 강하고 여성의 연합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남성 연합이 강하다는 것은 모든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단일한 결속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부계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친족이나 다른 여성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반면, 남성은 자원과 지위를 얻으려는 남성 대 남성의 경쟁을 거치며 위계적인 집단이 형성되고 그 위계가 강화된다. 남성들 사이의 경쟁 및 위계 구도에서 여성에 대한 통제는 남성의 능력과 동일시되며 여성의 성적 자율성이 제한된다. 스머츠는 남성이 여성의 행동을 통제하는 정도가 남성이 다른 남성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정도와 비례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진화론이 강간을 남성의 성욕, 남성의 본능으로만 설명한다는 오해는 진화론 자체의 문제이기보다 <강간의 자연사> 탓이 크다. 손힐과 파머는 분노나 적대감을 강간의 주요 동기로 보거나 강간의 원인을 남성 중심의 권력 이데올로기와 연결하는 다른 진화론자의 주장을 책에 싣지 않았다. 강간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비판해 많은 사람이 진화론을 불필요하게 오해하도록 만든 셈이다.

진화론의 발전에 기여해 온 여성들

여성은 진화론의 오랜 친구이자 비판자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윈의 연구 활동과 진화론의 전파에는 여성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다윈에게 동식물이나 어린아이에 대해 관찰한 바를 알리고 직접 수집한 표본을 보낸 이들은 대부분 다윈 주변의 여성이었다. 그들은 여러 꽃의 암술 모양을 비교한 내용을 편지에 적어 알리거나 금속 용기에 이끼를 깔아 표본이 훼손되지 않는 방식으로 꽃 표본을 보내곤 했다.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을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하고 그 역서에 자신만의 논평을 포함해 유명해진 클레망스 루아예도 여성이었다.

다윈과 동시대를 산 1세대 다윈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을 수용하는 한편 이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논평하고 재해석했다. 1875년 미국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앤트워넷 블랙웰은 최초의 다윈 비판서인 <자연계의 성>을 발표했다. 그는 남녀가 자연 선택을 통해 차이를 갖도록 진화했으나 그 가치는 동등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다윈 진화론을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는 자원으로 적극 활용했다.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세라 허디 출처: http://www.citrona.com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세라 허디 출처: http://www.citrona.com
약 한 세기가 지난 1990년대에는 바버라 스머츠, 퍼트리샤 고와티, 세라 허디 등 현대 페미니스트 진화론자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진화론의 남성 중심성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유전자 개념에 치중된 진화론의 생물학적 요소를 더 다채롭게 발전시키려 했다. 가령 퍼트리샤 고와티는 자연 선택을 어떤 유전자가 보존되는가의 문제로 보는 전통적 관점, 곧 유전자 결정론의 관점에서 벗어나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유전자 발현을 살피자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영장류를 연구해온 진화생물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세라 허디는 다윈 진화론에서 정숙하고 자기희생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려진 여성과 암컷의 특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허디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머니는 육아에만 헌신하는 어머니가 아닌 일하는 어머니라고 말한다. 현대의 수많은 일하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모성 대 야망’ 사이의 갈등은 모성을 여성의 본능으로, 출세의 야망을 남성의 본능으로 규정한 근대의 규범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허디는 여성의 양육 행위를 지극한 보살핌이나 헌신 등 소위 여성적 특징이 아닌 주도면밀한 전략이나 기업가 정신 같은 남성적 특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윈주의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스트 진화론자의 존재는 페미니즘과 진화론의 결합이 서로에게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진화론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로 활용됨으로써 페미니스트 정치의 자원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진화론이 남녀와 인간 사회를 생물학 결정론에 빠져 설명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강간은 진화의 산물일까,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일까? 앞서 살펴본 진화론의 역사는 이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간의 진화를 설명하려 한 진화론의 다양한 가설은 익히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거나 이를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쳐왔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진화론의 결합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오래전부터 시도되어왔다. 이제는 진화론을 배척하기보다 사회적 요인의 설명과 양립 가능한 진화론의 가설을 가시화할 때다. 진화론은 페미니즘을 통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여성이 진화론의 친구이자 비판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미 많은 선구자들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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