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염색체와 Y 염색체. 성염색체는 성별 결정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염색체에도 성별 결정에 영향을 주는 많은 유전자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보통 키, 목소리, 옷차림 등 겉보기 특성으로 다른 사람의 성별을 확인한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배 속 아기의 성별을 판별할 때는 대개 초음파 검사 화면으로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를 확인한다. 성별은 아기가 태어난 직후 확정되는데, 이때의 기준은 보통 밖으로 드러난 생식기의 형태다. 생식기로 판단하기 모호한 경우에 한해 염색체 검사로 성별을 살핀다. 인간의 염색체 23쌍 중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성염색체가 XX면 여성, XY면 남성이라는 생물학 지식은 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0년 초, 셋째 아이를 임신해 산부인과를 방문한 어느 40대 오스트레일리아 여성은 산전 검사의 결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평생 여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자신의 몸에 성염색체가 XX인 세포뿐 아니라 XY인 세포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떨까? 우리의 성별이 성염색체로 결정된다면, 40년 넘게 여성으로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른 나는 Y 염색체가 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남성이 되는 것일까?
Y 염색체는 어떻게 남성의 상징이 됐나
인간의 성염색체에 대한 연구는 1920년대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등 성호르몬 연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자나 초파리를 이용해 성염색체를 연구하려는 시도는 19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졌으나 당시 세포생물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의 관심사는 성염색체로 유전 현상 자체를 이해하는 데 있었다.
이와 달리 1920년대의 성호르몬 연구는 오늘날의 유전자 연구처럼 학계와 대중, 상업 영역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제약회사는 임신 보조제나 피임약, 호르몬 요법을 개발하고자 성호르몬 연구에 몰두했다. 대중은 성호르몬에 관한 보도를 일상적으로 접했고, 과학자들이 남녀의 몸에 대해 말해주는 바에 귀를 기울였다. 1921년 미국 국립연구위원회의 산하 기구로 구성된 국립성문제연구 자문위원회는 인간의 성과 관련된 연구를 금전적·사회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XYY 증후군 환자의 핵형. 빨간색 화살표는 XYY 염색체를 가리킨다. 출처 미국 국립보건원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졌던 인간의 성염색체 연구는 성호르몬 연구와 짝을 이루면서 인간의 성을 규명하는 과학으로 전문화됐다. 성호르몬 이론은 태아가 성장하며 성별이 달라지는 성별 가소성 현상을 비롯해 기존 성염색체 연구로는 충분히 규명하지 못했던 사례를 훌륭하게 보충 설명하는 듯했다. 성염색체가 ‘부속 염색체’, ‘이형(異型) 염색체’ 등 다른 이름을 제치고 ‘성염색체’라 불리기 시작한 것도, 성별의 본질처럼 상징화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성염색체 중에서도 Y 염색체는 1960~70년대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남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59년 Y 염색체가 남성 성별을 결정한다고 알려진 이래 과학자들은 Y 염색체를 하나 더 가진 남성을 ‘초남성’(super male)이라고 칭하며 이들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영국 세포유전학자 퍼트리샤 제이컵스는 폭력적 성향을 띠는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3.5%가 XYY 염색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하고, 이를 근거로 1965년 <네이처>에 “여분의 Y 염색체가 비정상적인 공격 행동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제이컵스의 주장이 미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그의 논문을 시작으로 XYY 염색체 연구는 1960~70년대 동안 이루어진 인간 Y 염색체 연구 중 82%를 차지하게 된다. 1970년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정신건강연구소에서는 XYY 염색체 이상을 주제로 한 공식 보고서를 발간하고 50쪽이 넘는 분량으로 XYY 남성의 사회적 행동과 법적 책임을 다뤘다. XYY 염색체가 가진 상징성은 대중문화로도 퍼졌다. 1976년 영국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The XYY Man)의 주인공은 여분의 Y 염색체 탓에 갖게 된 자신의 범죄 충동을 억누르며 악을 소탕하는 영웅 캐릭터로 설정됐다.
1976년 영국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The XYY Man)의 주인공은 여분의 Y 염색체 탓에 갖게 된 자신의 범죄 충동을 억누르며 악을 소탕하는 영웅 캐릭터로 설정됐다. 사진은 이 시리즈의 포스터.
과학계의 흑역사로 남은 ‘초남성’ 이론
Y 염색체에서 남성성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이 멈추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렸다. 1976년과 1977년 잇달아 발표된 대규모 역학조사는 XYY 남성의 97%가 범죄 이력이 없으며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XYY 남성 환자의 공격성이 XY 남성 환자의 공격성과 큰 차이가 없음을 지적했다. 방법론적인 오류 역시 심각했다. 기존 연구들은 Y 염색체와 연관된 공격성이 대체 무엇인지를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XYY 남성의 폭력적 성향에 영향을 줄 만한 환경적인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Y 염색체가 폭력적 남성을 만드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거나 이를 실험으로 입증하려 한 연구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Y 염색체가 하나 더 있는 염색체 이상이 신체 기능의 문제를 일으키리라고 보는 대신, 공격성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효과를 배가하리라고 가정했다는 것부터가 의아하다. 같은 보호시설에 있었던 남성 환자 중 X 염색체가 하나 더 많은 XXY 남성이 XYY 남성과 비슷한 비율로 존재했음에도 X 염색체가 아닌 Y 염색체를 폭력적 성향과 연결시켰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폭력적 성향을 대체로 남성적인 특징과 동일시하는 당대의 성 인식이 과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XYY 염색체 보고서(NIMH). 성염색체 중에서도 Y 염색체는 1960~70년대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남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
20세기 중반의 초남성 이론은 과학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이제는 Y 염색체가 남성 성별을 결정한다는 말조차 과학적으로 틀린 말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인간 유전체 연구가 꽃피며 Y 염색체 중에서도 성별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규명됐다. 그러나 1990년대 말에 이르러 그 유전자가 남성 성별을 결정하는 유일한 물질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2000년대 이후 이루어진 연구는 남성의 성별·생식과 관련한 유전자가 오히려 X 염색체에 모여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3번 염색체나 9번 염색체처럼 성염색체가 아닌 나머지 염색체에 위치한 특정 유전자가 남성의 고환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은 XY 염색체를 가져도 남성이 아닐 수 있고 XX 염색체를 가져도 남성일 수 있다. 예를 들어 Y 염색체를 가진 사람이라도 X 염색체 자리에 위치한 안드로겐 수용체 유전자에 문제가 생기면 고환에서 생성된 호르몬에 반응하지 않아 외형상 여성의 몸을 갖게 된다. 한편 남성의 고환은 보통 Y 염색체에 위치한 특정 유전자가 17번 염색체에 위치한 특정 유전자를 활성화하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Y 염색체가 아닌 다른 염색체에 위치한 어떤 인자가 17번 염색체의 유전자를 발현시킬 수 있다면 Y 염색체 없이도 고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성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성염색체가 아니다. 성염색체는 성별 결정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염색체에도 성별 결정에 영향을 주는 많은 유전자가 있다. 모든 인간이 성별에 관계없이 X 염색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X 염색체는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적이며 특히 뇌와 면역계가 형성되는 과정에 관여한다. Y 염색체가 남성 성별을 결정하지 않듯이 X 염색체도 여성 성별을 결정하지 않는다. 과연 성염색체를 계속 성염색체로 불러야 할까?
하버드대학교에서 젠더과학 연구실을 운영하는 세라 리처드슨 과학사학과 교수는 성염색체를 다른 명칭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부속 염색체나 이형 염색체 등 성별 결정과 무관한 이름으로 말이다. 리처드슨은 X, Y 염색체를 여성, 남성과 연결시키는 사회적 인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몸에서 Y 염색체를 발견한 40대 여성의 사례로 되돌아가 보자. 이 여성을 진찰한 의사는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그 비밀을 찾았다. 이 여성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수정되었는데, 원인 불명의 이유로 두 배아가 합쳐지면서 XY 염색체를 가진 세포가 그의 몸에 남게 되었다. 여성인 당신의 몸에 Y 염색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이제 처음과 같은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 이미 당신의 몸과 삶은 Y 염색체가 당신의 여성됨을 심각하게 위협할 만큼 결정적인 요소가 아님을 입증한다. 마찬가지로 Y 염색체는 당신이 남성이기에 용인되거나 기대되는 행위에 대한 생물학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숙명여자대학교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