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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자를 기다리는, 조신한 난자는 없다

등록 2020-07-31 05:00수정 2020-09-08 16:58

[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① 연재를 시작하며


마리 퀴리·로잘린드 프랭클린 등 과학계 부당한 대우 ‘여성 배제의 역사’
진화론부터 포스트휴먼까지 여성의 몸과 경험 더 잘 이해하는 과학 소개

이번주부터 3주마다 임소연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가 쓰는 ‘여성, 과학과 만나다’를 싣습니다.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나란히 커진 오늘날에도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는 양쪽의 최신 지식과 이론을 소개하며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꾀합니다.

‘수억 마리 정자는 난자 하나를 목표로 달려간다. 정자는 도중에 산성 물질에 죽거나 대식 세포에 잡아먹히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한다. 고난의 레이스 끝에 단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의 투명대를 뚫고 들어가 승자가 된다. 생명 탄생은 이렇게 수억 대 일의 확률로 정자가 난자와 만났을 때 시작되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지금까지 난자와 정자, 수정 과정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묘사되어 왔다. 정자는 자체적 추진력을 가진 능동적 존재로, 수정 과정은 이 능동적인 정자가 수동적인 난자를 포획하는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수정 과정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거대한 정자 무리가 물결치듯 움직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때로는 벽에 부딪히고 또 때로는 끈끈한 점액 속에 허우적대면서. 무리의 일부가 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서성대면 난자는 잠시 시간을 두고 그중 하나를 끌어당긴다. 생명 탄생은 이렇게 까다로운 난자가 정자를 선택하며 시작되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이는 2020년 과학의 이야기다.

지난 6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연구진이 <영국 왕립학회지>(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난자는 정자들이 경쟁하여 획득하는 목표물이 아니다. 난자는 화학 신호를 보내 스스로 선택한 정자를 끌어들인다. 정자는 난자의 여포액에 포함된 화학 물질에 반응해 이동하는 수동적 존재인 반면, 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에 적합한 정자를 골라내는 능동적 존재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할 ‘경쟁적인 정자 대 조신한 난자’ 이야기는 사실 과학자의 실험실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퇴출되기 시작했다. 실험실 밖의 세상은 인간의 이 두 생식 세포에게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만 말이다.

난자와 정자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 및 묘사의 변화는 과학과 성차별, 그리고 여성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생물학은 생물과 인체에 대한 과학이기에 성차별적 인식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하고 성차별적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때문에 과학 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은 페미니즘의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아 왔다.

18세기 영국 해부학자 존 바클리는 여성과 타조의 골격을 비교했는데 이때 여성의 골격은 작은 두개골과 넓은 골반이 두드러져 표현됐다. 낮은 지능과 출산 기능이라는 여성 신체의 특성을 남성의 것과 대조하여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8세기 영국 해부학자 존 바클리는 여성과 타조의 골격을 비교했는데 이때 여성의 골격은 작은 두개골과 넓은 골반이 두드러져 표현됐다. 낮은 지능과 출산 기능이라는 여성 신체의 특성을 남성의 것과 대조하여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성과 과학, 오래된 배제의 역사

생물학은 남녀의 신체적 기능 및 차이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며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를 만들고 강화하는 데 일조한 바 있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 중 하나가 18세기 중반의 골격학이다. 18세기 중반 영국의 해부학자 존 바클리는 여성과 타조의 골격, 남성과 말의 골격을 나란히 그려 넣은 해부학 책을 썼다. 타조와 비교된 여성의 골격은 작은 두개골과 넓은 골반이 두드러져 표현됐는데, 이는 낮은 지능과 출산 기능이라는 여성 신체의 특성을 남성의 것과 대조하여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8세기의 골격학을 대신하여 19세기의 다윈 진화론과 20세기 이후의 유전학·신경과학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밝히는 데에 골몰해 오기도 했다. 이처럼 과학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성차별과 성 편견을 드러낸다.

과학은 또한 과학 탐구의 대상에서 여성의 몸을 배제해 왔다. 의약품 개발이나 생명의학 연구가 주로 남성이나 수컷 동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던 관행은 그동안 과학이 여성의 몸에 무관심했음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심근경색과 같은 심혈관 질환은 주로 중년 남성이 걸리는 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심장 질환은 여성 사망 원인 중 2위를 차지한다. 여성 역시 심혈관 질환에 취약하고 치료가 필요함에도 심혈관 질환 관련 연구에서 피험자는 대부분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유럽 연합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은 전체 심혈관 질환 환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반면 임상 시험에서 여성 피험자의 비율은 약 30% 정도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연구 관행은 여성 환자의 건강을 위협한다. 2018년 미국 심장 협회는 심근경색이 처음 나타난 45세 이상 성인 중 1년 내 사망률이 남성은 18%, 여성은 23%라고 밝혔다. 심근경색 여성 환자는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첫 증상 후 수 주 내 사망할 가능성도 남성보다 높았다. 이는 여성의 심혈관 질환 위험 요인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점과 관련이 깊다. 가령 남성은 심근경색의 전조 증상으로 전형적인 가슴 통증을 호소하지만 여성에게서 이 전조 증상은 심장과 무관해 보이는 소화불량, 팔과 다리의 통증, 전신 피로 등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남성 환자 위주로 마련된 진단 기준에 의해 여성 환자의 전조 증상은 다른 질병의 증후로 오인되어 심근경색으로 진단받는 시점이 늦어지고 치료 시점도 늦어지게 된다.

1911년 세계 최초의 물리학·화학 학회인 제1회 솔베이 회의에 여성과학자로서 유일하게 참석한 마리 퀴리(앉아 있는 사람들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911년 세계 최초의 물리학·화학 학회인 제1회 솔베이 회의에 여성과학자로서 유일하게 참석한 마리 퀴리(앉아 있는 사람들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과학이 여성 과학자를 배제해 온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는 위인전 전집에 빠지지 않고 수록되는 유명한 과학자다. 그런 그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1903년 노벨물리학상 후보에서 제외될 뻔했다. 위원회가 여성인 마리 퀴리를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남성 동료 앙리 베크렐과 동등한 공동 연구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가 1906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용된 것도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생물물리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또한 과학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대표적인 여성 과학자다. 1960년대 초,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한 DNA X선 회절 사진을 무단 도용해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프랭클린이 확보한 자료는 논문으로 발표되기 전이었기에 DNA 구조를 규명한 왓슨과 크릭의 <네이처> 논문 참고 문헌으로도 인용되지 못했다. 프랭클린은 왓슨이 쓴 대중서인 <이중나선>에서 성격 나쁜 여성으로 묘사되는 등 폄하된 채 잊혔다가, 몇십 년이 지나서야 그 업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과학계의 성차별적 태도는 21세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15년 세계 과학 기자 대회의 기조 강연자로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팀 헌트는 여성 과학자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언론을 통해 사과했다. 그는 여성 과학자를 “소녀”(girl)라고 부르며 여성은 실험실에서 늘 사랑에 빠지고 비판을 받으면 울기만 한다면서 남성만 있는 실험실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역시 면역학 분야의 대학 교수로 일하는 여성 과학자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과학은 여성의 친구인 적이 거의 없었다. 과학의 역사 속에서 남성은 지식의 탐구자로 그리고 지식이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해 온 반면, 여성은 과학자로서도 그리고 과학의 대상으로서도 배제되어 왔다.

여성과 과학, 배제의 역사를 넘어

과학이 여성을 배제해 온 역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도대체 이런 과학이 어떻게 여성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앞으로 과학이 더 많은 여성의 몸을 연구하고 더 많은 여성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다면 여성을 배제해 온 과학의 역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나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난자와 정자에 관한 지식이 변화했듯이 과학은 남녀에게 부여된 역할과 상징을 완전히 뒤집는 지식을 내놓기도 한다. 어쩌면 과학은 여성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식일지도 모른다.

과학은 이미 여성의 곁에 다가와 서성대고 있다. 이 연재는 여성 주위에 모여든, 여성의 친구가 될 만한 과학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본 연재는 여성의 관점에서 과학을 새롭게 바라보고, 과학의 관점에서 여성의 몸과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성의 건강을 증진하는 과학, 여성의 삶과 몸, 경험을 더 잘 이해하게 돕는 과학, 여성이 생산하고 분석한 과학이 소개될 예정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크다. 이와 동시에 4차 산업혁명 담론에 뒤이은 포스트 코로나 담론 속에서 과학기술의 힘과 한계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여성과 과학에 대해서 성찰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는 없을 듯하다. 앞으로 섹스와 젠더, 뇌와 위, 진화론과 양자역학, 태아와 모체, 임신과 불임, 비만과 성형, 로봇과 인공지능, 인류세와 포스트휴먼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본 연재가 소개하는 과학 연구를 따라가다 보면 여성과 과학의 만남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난자와 정자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숙명여자대학교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 교수

임소연 교수는 서울대 자연과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공대에서 박물관학으로 석사 학위를,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기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과학기술의 시대 사이보그로 살아가기>, <포스트휴머니즘과 문명의 전환>(공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공저)이 있다.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과학기술과 여성 관련 연구 및 강의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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