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4월11일은 무엇을 떠오르게 하는가? 우선 4월11일은 기념일도 공휴일도 아닌 까만 날이다. 심지어 4월11일은 월요일도 금요일도 아니라 평일 가운데서도 별다른 임팩트 없는 목요일이다. 그리고 4월11일은 이 칼럼이 발행되는 날로부터 딱 일주일 뒤다. 쉽게 말하면 아무 날도 아니다.
4월11일은 헌법재판소가 2012년, 4 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던 낙태죄의 위헌(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기에 유력한 날이다. 역사적인 결정을 앞두고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아직도 여자가 사제가 될 수 없고 어린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하며 신부가 수녀를 강간해 낙태시킨 역사를 이제야 인정한 종교의 자궁 없는 추기경이 낙태를 비난하는 이유는 생명을 중시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원칙적으로는 아이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없는 이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여성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국가가 재판하는 문제에 천연덕스럽게 말을 얹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남성으로 이루어져 남성을 옹위한다는 면에서 종교와 국가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낙태라는 결정은 죄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에 의하여 내려지기 마련이다. 다만 불법 낙태는 여성의 생명을 위협한다. 시간을 소요함으로써 태아가 감각할 고통을 구태여 만들어낸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이유에서도, 생명권이라는 이유에서도, 7년 전 합헌 결정을 받았던 자기낙태죄와 동의낙태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4월11일은 아무 것도 보호하지 못한 채 여성 아닌 모든 이들과 합심해 여성의 몸을 점유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만을 담은 법이 사라질지도 모를 날이다.
4월11일은 2009년 <조선일보>가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일보 사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발언한 국회의원을 고소한 날이다. 장자연의 죽음 이후 십년을 흘려보내고 우리는 윤지오라는 인물 덕분에, 그 사이에 목소리를 내면서 모습을 드러낸 여성들이 더 많아진 덕분에,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을 다시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십년을 미루었으면 그의 죽음을 수식하는 ‘성상납’이라는 오명을 걷고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때다. 권력자 남성이, 남성이라는 권력자가 약자인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약자에게 저지른 잘못에 응답하지 않았던 십년의 오랜 과오에 용서를 구해야 할 때다. 장자연은 죽어 나타났지만 살아 나타난 윤지오가 죽지 않게 보호해야 할 때다. 살려달라는 장자연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이 또 다시 살게 해달라는 윤지오를 보호하지 않은 새로운 과오에 또 한 번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로부터.
4월11일은 기념일도 공휴일도 아니고 한 주를 다시 한번 기운차게 시작해 보자는 산뜻함도 드디어 끝냈다는 개운함도 주지 않는 평범한 날이다. 달리 말해 아무 날도 아니다. 날짜와 함께 기념되지는 않겠지만 오는 4월11일은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된 날이다. 그날 온 신문은 한미정상회담으로 도배될 것이다. 그래서 한 주 앞선 신문에 미리 말해둔다. 4월11일은 아무 날도 아닌 데다 국가의 행사로 시끌벅적할 예정인 날이지만, 여성의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고통에 대해 또 치욕에 대해 숱하게 외치고도 꾸준히 외면당한 우리에게 이번만은 그냥 지나 보낼 수 없는 날이다.
작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