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의 발-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
이상길 지음/문학과지성사·2만9000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오늘날 국제적인 수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인용되는 사회학자로 손꼽힌다. 그의 지적 영향력은 사회학, 철학, 미학, 인류학, 교육학, 정치학, 커뮤니케이션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닿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그의 저작 20여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낯설지 않은 ‘대가’다. 그렇지만 우리가 과연 부르디외를 제대로, 잘 ‘써먹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르디외와 미셸 푸코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이론과 미디어 문화를 연구해온 이상길 연세대 교수(커뮤니케이션대학원)는 새 책 <아틀라스의 두 발>에서 “부르디외에 대한 국내 연구 상황은 놀랄 만큼 정체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국내 저자의 부르디외 관련 연구서는 넉넉잡아도 다섯 권을 넘지 못하고, 부르디외의 사유를 이론적으로 접근한 학술 논문 또한 기껏해야 40편 미만”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해 부르디외와 그의 이론, 그리고 그를 둘러싼 우리의 수용까지 폭넓게 조명한다.
프랑스 리옹 지역에 있는 ‘혼돈의 집’(Abode of Chaos) 예술 박물관 벽에 그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얼굴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지식인의 초상’이 부르디외의 삶과 학문에 대한 전기라면, 2부 ‘이론적 지평’은 부르디외의 주요 이론들에 대한 해설이다. 시골 출신 철학자 지망생이었던 부르디외는 알제리 체류 경험을 계기로 사회학의 길을 택했고, 경험적 조사연구를 꾸준히 수행하는 동시에 나름의 사회 이론을 발전시켰다. 파리로 상경한 대학생들의 문화자본 문제(<상속자들>), 고등교육기관 교수들의 위치와 입장(<호모 아카데미쿠스>), ‘권력 장(場)’을 지배하는 엘리트 집단의 형성(<국가 귀족>) 등 그의 연구들은 “자기로부터 시작해 자기 너머로 나아가는 지적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관찰자인 지식인 스스로가 포함된,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구조 자체를 대상화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9.27 피에르 부르디외. 김경호기자 jijae@hani.co.kr
특히 지은이는 부르디외가 보편의 설정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역사적 상대주의나 허무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역사적인, 따라서 한시적인 보편”이란 개념을 통해 다시금 ‘보편적인 것’을 쟁취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데에 주목한다. 그의 지적 기획은 대체로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무기로 삼아 감춰진 지배 체제의 구조를 드러내는 ‘비판적 계몽’의 성격을 띤다. “부르디외가 일생에 걸쳐 실천한 연구 노동은 한편으로는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과학적 정립’으로 특징지어진다.” ‘구별짓기’, ‘하비투스’, ‘문화자본’, ‘상징폭력’과 같은 개념들이나 나름의 지식 체계로 내세운 ‘장(場) 이론’, 연대를 추구하는 ‘집합적 지식인’ 등은 여기서 나온 이론적 도구들이라 할 수 있다.
3부 ‘수용의 단층’에서 지은이는 부르디외 저작들의 우리말 번역 현황에서부터 번역자가 누군지, ‘역자의 글’에 어떤 내용들이 언급됐는지 등 우리나라에서 부르디외가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부르디외는 1990년대 중반 문화경제가 성장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는 상황에서 문화와 계급을 비판적으로 논한 프랑스 ‘거대 이론가’로 등장했다. 2000년대 초에는 신자유주의와 전지구화의 해악을 비판한 ‘참여 지식인’으로 한동안 부각되었다가, 이제는 주로 교육과 문화 소비 등 특정 분야의 경험적 조사연구를 위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전문 사회학자’로 소환되는 중이다.” 90년대 이후 이른바 ‘불란서제 담론’이 대거 수입되는 흐름에 부르디외 사회학이 묻어들어온 셈인데, 그런 와중에 부르디외의 지적 기획이 지닌 전체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름난 ‘서구 이론’을 앙상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우리 학계의 풍토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학자들 가운데 왜 하필 부르디외가 중요한가? 지은이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고갱이로서 ‘성찰성’에 주목한다.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우리는 지식의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을 비판 없이 내면화하는 ‘스콜라적 관점’을 넘어서야 할 뿐 아니라, 경험적 현실과 괴리된 채 ‘서구 이론’에 갇힌 ‘식민지적 관점’까지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때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묻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성찰성’은 이런 과제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사회학까지도 들어올릴 수 있는 학문적 지렛대의 받침점을 우리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개념이나 이론, 연구 주제 등이 ‘수표’와 같은 유산이라면, “우리 사회의 부르디외 수용 과정에서 제대로 주목받은 적 없는 이 부분(‘성찰성’)이야말로 ‘프랑스 거장’의 서명 자체가 의도치 않은 상징폭력으로 전화할 수 있는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더욱 귀중하며 활용도가 높은 ‘현금’의 유산이다.” 물론 부르디외 사회학의 빈틈 등 ‘빚’으로서의 유산이 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