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규의 다독시대
누운 배
이혁진 지음/한겨레출판(2016) 대한민국이 무너졌다. 지도자가 무너지면서 국가의 존엄도 함께 가라앉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붕괴의 징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처럼 붕괴된 사회구조에서는 한가지 착시가 일어난다. 그것은 파편화한 개인이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동시에 유일한 환각이다. 우리는 무너진 사회, 그 폐허 위에서 여전히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소망이 환각에 기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인정은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말하며 우려한다. 이처럼 이미 무너졌음을 긍정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를 대한민국의 한 중심이 무너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간다. 그것이 파편화한 개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환각을 통한 소망의 부여잡기다. 하지만 이 시대, 그나마 남아 있던 환각의 다리마저 스스로 걷어치웠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내려앉았다. 3년 전 4월,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 무너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단순한 재난을 가리키는가. 아님, 사회구조 붕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가.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는 이 질문에 대해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한다. 사회구조의 붕괴라고. 사회 소설인 동시에 기업 소설로 평가받는 장편소설 <누운 배>는 중국에 자리 잡은 한국 조선소에서 진수식이 끝난 배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의 특징은 멀쩡히 서 있던 배가 왜 쓰러졌는지, 사고 원인에는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 소설은 단지 배가 쓰러졌다는 사실, 그 이후의 과정에만 관심 갖는다. 배의 무너짐에 대해선 누구도 책임 있게 말하지 않는다. 진실은 온전히 비껴간다. 비껴간 자리에 남는 건 선가 피해액 보상을 위한 이해관계의 조율, 회사 간 이익을 위한 실무 협의, 그 과정에서 차라리 누워 있는 배가 밥줄이라고 말하는 비극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간 군상뿐이다. <누운 배>의 리얼리즘은 피상적 사회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구조 속에 중층으로 뒤엉켜 있는 허위의 보신주의, 그 궁극을 해부하듯 보여준다. 이 보여주기로 인해 우리는 재앙의 형이상학, 대한민국의 붕괴된 현주소를 분명히 목격한다. 안팎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 있는 그대로 폭로되는 것이다. <누운 배>는 담담히 말한다. 오늘의 한국사회, 이미 무너졌다고. 아마도 이 소설은 2000년 이후 한국소설 중 가장 건조하고 우울한 보고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누운 배’에 등장하는 침몰한 배의 흔적 앞에서 중얼거리듯 묻는다. 이미 무너져 내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 거냐고. 다 무너졌다고 외치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믿는다. 이 비관의 폐허 위를 묵묵히 나아갈 수 있음을. 환각이 아니므로, 거짓 소망이 아니므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몸서리칠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 그대로 끌어안고 나아갈 것을 믿는 것이다. 2017년 장미 대선은 낭만이 소거된, 이미 무너졌음을 확인한 뒤에 세우는 전혀 다른 집을 위한 한 걸음이다.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그래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역설의 소망이 다시 타오르길 기대한다. 주원규 소설가
이혁진 지음/한겨레출판(2016) 대한민국이 무너졌다. 지도자가 무너지면서 국가의 존엄도 함께 가라앉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붕괴의 징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처럼 붕괴된 사회구조에서는 한가지 착시가 일어난다. 그것은 파편화한 개인이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동시에 유일한 환각이다. 우리는 무너진 사회, 그 폐허 위에서 여전히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소망이 환각에 기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인정은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말하며 우려한다. 이처럼 이미 무너졌음을 긍정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를 대한민국의 한 중심이 무너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간다. 그것이 파편화한 개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환각을 통한 소망의 부여잡기다. 하지만 이 시대, 그나마 남아 있던 환각의 다리마저 스스로 걷어치웠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내려앉았다. 3년 전 4월,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 무너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단순한 재난을 가리키는가. 아님, 사회구조 붕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가.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는 이 질문에 대해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한다. 사회구조의 붕괴라고. 사회 소설인 동시에 기업 소설로 평가받는 장편소설 <누운 배>는 중국에 자리 잡은 한국 조선소에서 진수식이 끝난 배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의 특징은 멀쩡히 서 있던 배가 왜 쓰러졌는지, 사고 원인에는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 소설은 단지 배가 쓰러졌다는 사실, 그 이후의 과정에만 관심 갖는다. 배의 무너짐에 대해선 누구도 책임 있게 말하지 않는다. 진실은 온전히 비껴간다. 비껴간 자리에 남는 건 선가 피해액 보상을 위한 이해관계의 조율, 회사 간 이익을 위한 실무 협의, 그 과정에서 차라리 누워 있는 배가 밥줄이라고 말하는 비극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간 군상뿐이다. <누운 배>의 리얼리즘은 피상적 사회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구조 속에 중층으로 뒤엉켜 있는 허위의 보신주의, 그 궁극을 해부하듯 보여준다. 이 보여주기로 인해 우리는 재앙의 형이상학, 대한민국의 붕괴된 현주소를 분명히 목격한다. 안팎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 있는 그대로 폭로되는 것이다. <누운 배>는 담담히 말한다. 오늘의 한국사회, 이미 무너졌다고. 아마도 이 소설은 2000년 이후 한국소설 중 가장 건조하고 우울한 보고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누운 배’에 등장하는 침몰한 배의 흔적 앞에서 중얼거리듯 묻는다. 이미 무너져 내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 거냐고. 다 무너졌다고 외치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믿는다. 이 비관의 폐허 위를 묵묵히 나아갈 수 있음을. 환각이 아니므로, 거짓 소망이 아니므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몸서리칠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 그대로 끌어안고 나아갈 것을 믿는 것이다. 2017년 장미 대선은 낭만이 소거된, 이미 무너졌음을 확인한 뒤에 세우는 전혀 다른 집을 위한 한 걸음이다.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그래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역설의 소망이 다시 타오르길 기대한다. 주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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