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길의 박우정 대표(가운데)와 천정은 편집차장(왼쪽), 이승우 기획실장.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작지만 강한 출판사 ② 길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국내 번역본이 5종 넘게 나와 있다. 이 중 2010년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사회학자 김덕영씨의 번역본은 다른 번역본 두께의 두배가 넘는다. 본문에 나온 인명이나 역사적 사건, 개념어 등에 대한 주석은 물론 베버가 달아놓은 주석에 대한 주석, 이 저서의 후속 논문 격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의 번역본, 150여쪽에 이르는 역자의 해제까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중역이 아닌 독일어 원전 번역임은 기본이다.
‘거대한 전환’ ‘프로테스탄티즘…’
고전·학술서 ‘돈 안되는 책’ 고집
독자에 대한 확신 “마케팅은 없다” 이 책은 고전 번역의 ‘정본’을 만들겠다는 길의 지향이 구현된 한 사례다. 키케로의 <수사학>, 노자의 <노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 등 길에서 낸 고전 번역 시리즈인 ‘코기토 총서’ 하나하나에 길의 ‘완벽주의’가 배어 있다. 게오르크 지멜의 <돈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등도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국내외 지성계의 문제작들을 내는 ‘프런티어 21’, 국내 학자들의 의미있는 연구성과를 묶어내는 ‘인문정신의 탐구’도 이 출판사가 자신있게 내놓는 시리즈이다. <세계인권사상사>(미셸린 이샤이),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김동춘),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전자에,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위상복), <차이와 연대: 현대 세계와 헤겔의 사회·정치철학>(나종석), <부정의 역사철학>(박구용) 등이 후자에 속하는 대표작들이다. 길은 2003년 만들어진 이래 10년 동안 동서양 고전 번역,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정통 학술서, 깊이있는 교양서를 만들어왔다. 한마디로 ‘돈 안 되는 책들’, 하지만 한국 사회 지적 생태계에 꼭 필요한 책이다. 지난 21일 서울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우정(63) 길 대표는 “상업성을 떠나 우리 사회 지적 인프라 구축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낸 책이 160여종에 이른다. 길의 직원은 박 대표와 이승우(45) 기획실장, 천정은(35) 편집차장 등 3명이다. 외부 프리랜서 편집자들도 활용한다. 이 실장은 “현재와 같은 출판 환경에서는 출판사 규모가 커져 경상비가 늘어나면 고전번역·인문학술서 전문 출판사라는 길의 색깔을 유지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라며 “외부 편집자들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같이 일을 해와 우리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전문성이 높다”고 말했다. 길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영업’이나 할인행사, 마케팅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고의 책은 독자가 알아본다’는 믿음에서다. 이 실장은 “서점의 매대 책임자를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어, 서점 쪽에서는 아마 우리를 ‘유령출판사’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웃었다. 길이 낸 책 중에 소위 ‘대박’은 없다. 1만4000부가 나간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하지만 전공자들과 인문학에 관심있는 고급 독자들에게 기본 수요가 있어 생명력이 길다.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팔린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작은 규모지만 이익이 나서 재투자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는 인문·사회 출판시장은 길처럼 외길을 걷는 출판사에는 심각한 위협요소다. 박 대표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초판을 1500~2000부는 찍었는데 지금은 700~800부를 찍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대학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연구자들이 임용과 승진심사 등으로 연구의 자율성을 잃어가는 추세, 영어강의·영어논문 우대 정책 등의 영향으로 학계의 미국유학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현실 등도 문제다. 저자층을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독일, 프랑스 등 비영어권 고전들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고, 깊이있는 학술서를 써낼 수 있는 학문 인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대표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이 사멸되는 위기를 막으려면, 정부에서 도서관 예산을 늘려 좋은 책을 구입해주는 등 재정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획기적인 정책 전환을 통한 교육과 출판의 부활 없이는 ‘창조경제’와 선진국 진입은 요원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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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술서 ‘돈 안되는 책’ 고집
독자에 대한 확신 “마케팅은 없다” 이 책은 고전 번역의 ‘정본’을 만들겠다는 길의 지향이 구현된 한 사례다. 키케로의 <수사학>, 노자의 <노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 등 길에서 낸 고전 번역 시리즈인 ‘코기토 총서’ 하나하나에 길의 ‘완벽주의’가 배어 있다. 게오르크 지멜의 <돈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등도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국내외 지성계의 문제작들을 내는 ‘프런티어 21’, 국내 학자들의 의미있는 연구성과를 묶어내는 ‘인문정신의 탐구’도 이 출판사가 자신있게 내놓는 시리즈이다. <세계인권사상사>(미셸린 이샤이),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김동춘),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전자에,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위상복), <차이와 연대: 현대 세계와 헤겔의 사회·정치철학>(나종석), <부정의 역사철학>(박구용) 등이 후자에 속하는 대표작들이다. 길은 2003년 만들어진 이래 10년 동안 동서양 고전 번역,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정통 학술서, 깊이있는 교양서를 만들어왔다. 한마디로 ‘돈 안 되는 책들’, 하지만 한국 사회 지적 생태계에 꼭 필요한 책이다. 지난 21일 서울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우정(63) 길 대표는 “상업성을 떠나 우리 사회 지적 인프라 구축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낸 책이 160여종에 이른다. 길의 직원은 박 대표와 이승우(45) 기획실장, 천정은(35) 편집차장 등 3명이다. 외부 프리랜서 편집자들도 활용한다. 이 실장은 “현재와 같은 출판 환경에서는 출판사 규모가 커져 경상비가 늘어나면 고전번역·인문학술서 전문 출판사라는 길의 색깔을 유지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라며 “외부 편집자들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같이 일을 해와 우리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전문성이 높다”고 말했다. 길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영업’이나 할인행사, 마케팅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고의 책은 독자가 알아본다’는 믿음에서다. 이 실장은 “서점의 매대 책임자를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어, 서점 쪽에서는 아마 우리를 ‘유령출판사’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웃었다. 길이 낸 책 중에 소위 ‘대박’은 없다. 1만4000부가 나간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하지만 전공자들과 인문학에 관심있는 고급 독자들에게 기본 수요가 있어 생명력이 길다.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팔린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작은 규모지만 이익이 나서 재투자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는 인문·사회 출판시장은 길처럼 외길을 걷는 출판사에는 심각한 위협요소다. 박 대표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초판을 1500~2000부는 찍었는데 지금은 700~800부를 찍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대학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연구자들이 임용과 승진심사 등으로 연구의 자율성을 잃어가는 추세, 영어강의·영어논문 우대 정책 등의 영향으로 학계의 미국유학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현실 등도 문제다. 저자층을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독일, 프랑스 등 비영어권 고전들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고, 깊이있는 학술서를 써낼 수 있는 학문 인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대표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이 사멸되는 위기를 막으려면, 정부에서 도서관 예산을 늘려 좋은 책을 구입해주는 등 재정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획기적인 정책 전환을 통한 교육과 출판의 부활 없이는 ‘창조경제’와 선진국 진입은 요원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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