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사 전집에 7살 활자 중독
체력·집요함으로 만드는 문장력
번역부터 에세이·칼럼·소설까지…
다음은 영화나 드라마일지도
체력·집요함으로 만드는 문장력
번역부터 에세이·칼럼·소설까지…
다음은 영화나 드라마일지도
번역가를 찾아서 │ 박산호 번역가
번역을 하면서 삶과 번역에 대한 에세이도 많이 썼다. 스릴러 번역으로 이름을 날리더니 스릴러 소설도 한편 뚝딱 써냈다. 틈틈이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쓰더니 요즘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인터뷰 연재까지 하고 있다. 대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 박산호 번역가를 찾아갔다.
이 모든 것은 계몽사 전집에서 시작됐다고 그는 고백했다. 계몽사 외판원이었던 아버지가 집에 들여놓은 100권짜리 동화 전집은 7살짜리 그를 활자 중독으로 만들었다. 이토록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가 있다는 데 충격을 받은 그는 스스로 ‘책’이라는 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영어는 두번째 만난 신세계였다. 이때부터 ‘영어’와 ‘책’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 없는 그가 ‘번역가’가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어 보였다.
첫 스릴러 번역은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가 로런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황금가지)였다. “평생 이런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했고, 출판업계도 그에게 스릴러 작품을 몰아주며 화답했다.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경제경영서부터 과학·인문과학서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했지만, 업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부터는 ‘소설과 에세이만 번역합니다’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17년간 100여권의 책을 번역했다. 그의 번역 목표는 “등장인물이나 배경은 저 멀리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국 소설처럼 문장도 아름답고,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듯 바로 독자의 마음에 스밀 수 있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문장력이고, 문장력에 필요한 게 집요함이고, 집요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그는 믿는다. “번역가는 자기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문장을 풀어내는 거 같아요.” 그의 체력과 집요함 덕분에 독자들은 그의 번역작을 몰아치듯 술술 읽게 된다.
남의 책을 번역하다 보니 ‘나의 글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 등의 에세이를 펴냈다. 그의 글은 세상에 대한 섬세한 시선과 단단한 태도를 담백한 문체로 풀어낸다. 지금은 ‘긍정의 말들’이란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있다.
지난해에는 스릴러 소설 ‘너를 찾아서’(더라인북스)를 펴냈다. 어느 날 그를 사로잡은 하나의 이미지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 이끌려 3개월 만에 써낸 심리 스릴러로, ‘짜릿하면서도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20년 가까이 스릴러 소설을 번역하다 보니 스릴러 문법과 구조가 체화된 것 같다”는 그는 지금은 청소년 소설을 한편 쓰고 있다.
그에게 스릴러의 매력은 “답이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억울한 일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지만, 스릴러에서는 범인이 잡히고 해결도 되죠.” 그에게 스릴러는 공포물이 아니라 판타지인 셈이다.
번역, 에세이, 소설 중 가장 재밌는 건 무엇일까?
“번역은 항상 누군가가 내 어깨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 누군가는 원작자거나 독자겠죠. 원작자의 의도대로 잘 번역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은지 계속 의식하면서 번역을 하니까 정신적으로 부담이 크죠. 에세이는 마음 가는 대로 쓸 수 있어서 좋았지만 거짓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소설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면 되니까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하지만 완성도나 작품성에 대한 독자의 기대치가 훨씬 높기 때문에 첫 소설을 내고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번역을 하다가 에세이를 쓰니까 또 다른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고, 소설을 쓰니까 또 다른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열기 무서운 문이었지만 이 문을 여니까 또 다른 세계가 보여서 굉장히 좋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체성이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쓰는 것에 있어서는 다 해보고 싶어요.” 에세이와 소설뿐만 아니라, 칼럼과 인터뷰까지 쓰는 이유다.
그의 번역작들은 특히 영화와 인연이 깊다. ‘무덤으로 향하다’는 영화 ‘툼스톤’으로 제작됐고, 영화 ‘월드워제트(Z)’의 원작인 ‘세계대전 제트(Z)’, ‘차일드 44’의 동명 원작, ‘녹터널 애니멀스’의 원작 ‘토니와 수잔’ 등 숱한 원작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도 ‘긴장감과 생동감이 뛰어나다’ ‘한편의 영화를 본 느낌이다’ ‘드라마를 정주행한 느낌이다’ 등의 독자평을 받았다. 영화 쪽에서 관심을 보이자, 그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도 공부 중이다. “어려서부터 내가 무얼 할 수 있고 나의 잠재력의 최대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는 그의 다음 문은 영화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어떤 고독은 외롭지 않다
데이비드 소로,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디킨슨 등 13명의 유명 작가가 혼자만의 시간에서 발견한 오직 나 하나로 충분해지는 법을 알려준다. ‘고독’을 주제로 한 그들의 시, 에세이, 단편소설 등을 한권에 모은 앤솔러지다. 박 번역가는 “고독에 대한 글들이 너무 아름다운데다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던 작품”이라고 전했다.
데이비드 소로 등, 인플루엔셜(2022)
위민 토킹
현재 가장 주목받는 캐나다 작가가 볼리비아 메노파 공동체에서 실제로 일어난 집단 성폭력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이다. 출간 직후 각종 언론과 평단의 찬사와 함께 영화로도 제작됐고 2023 아카데미 작품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박 번역가는 “종교 권력과 언어의 힘 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귀띔했다.
미리엄 테이브스, 은행나무(2023)
하트스토퍼
영국 남자 중등학교에 다니는 소년 찰리와 닉 사이에 싹튼 사랑과 성장을 다룬 그래픽 노블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박 번역가는 “청소년기의 사랑과 우울증에 대해 깊이 있게 다가가는 작품으로 혹시 10대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자녀가 있는 분들에게 강추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앨리스 오스먼, 위즈덤하우스(2021)
불의 날개 시리즈
세상을 구하는 다섯 마리 용의 성장 스토리로 21개국어로 출간돼 1천만부 이상 판매된 블록버스터급 판타지 그래픽 노블이다. 박 번역가는 “아이들 책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너무나 감동적”이라며 “전세계적으로 팔린 이유가 있는 작품으로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특히 추천한다”고 말했다.
투이 서덜랜드, 김영사(2022)
에세이스트와 소설가로도 활동 중인 박산호 번역가는 “쓰는 것에 있어서는 다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본인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