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귀수 번역가를 경기 파주시 문산에 있는 그의 자택 작업실에서 만났다. 두 평 남짓한 작업실을 그는 자신의 “갑옷”으로 여긴다.
성귀수 번역가는 자신의 작업실을 “갑옷”이라고 여긴다. 두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은 빽빽한 책꽂이를 철갑처럼 둘렀고, 한가운데 있는 의자의 앞뒤로 책과 메모가 빼곡한 책상이 놓여 있어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 책꽂이의 원서들은 그만의 분류기준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에이(A) 그룹은 신비주의와 관련된 책들이고, 비(B) 그룹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에로티즘 관련 책들, 시(C) 그룹은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책들”이다.
지난 20여 년간, 그는 이 책들을 가방에 넘치도록 넣어 들고 출판 관계자들을 만났다. 책의 가치와 국내 출간의 필요성을 입이 닳도록 설명하면, 그중 10%가량이 실제 출간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가 번역할 작품을 대부분 직접 발굴하고 기획해온 것은 “번역가는 책을 소개하는 사람”이며, “읽기 어려운 것, 일반인의 손에 잘 닿지 않는 것,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큰 가치를 지닌 것”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이 번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다.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세 명의 사기꾼>(스피노자의 정신, 아르떼, 2017)은 모세·예수·마호메트를 비판한 작자미상의 전설적 괴문서다. <뉴욕타임스>가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책”으로 지목한 <힘이 정의다>(래그나 레드비어드, 영림카디널, 2015) 또한 작자미상으로, 위험하고 극단적인 생각을 유려한 문장으로 써낸 까닭에 문헌의 원작자가 니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괴이하고, 희귀하며, 폄하된 것에 끌린다. 2003년 모리스 르블랑의 사라진 원고를 찾아내 당시 프랑스에도 없던 ‘세계 최초의 아르센 뤼팽 전집’을 완성한 것은 운이 좋아서도, 그가 ‘뤼팽 덕후’여서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장르문학을 낮잡아보고 “추리소설은 애들이나 보는 것”쯤으로 여기던 시절, 프랑스 추리문학 고전의 재미와 가치를 제대로 조명하고자 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도둑 출신 사립탐정이자 범죄해결에 최초로 ‘수사’의 개념을 도입해 당대의 아이콘이 된 프랑수아 비도크의 회고록에서 출발해, 추리문학의 용어를 정리하고 장르화한 에밀 가브리오의 ‘르꼬끄 탐정 시리즈’와 앙리 코뱅의 <막시밀리앙 헬러>(한스미디어, 2016), 그리고 20세기 들어 추리문학을 활짝 꽃 피운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와 <오페라의 유령>(문학세계사, 2001)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추리소설들, <팡토마스1~5>(문학동네, 2012~2015)와 ‘경감 메그레 시리즈’에 이르는 프랑스 고전 추리문학의 계보를 촘촘히 이어 안내하려는 큰 그림의 시작이 20권짜리 <아르센 뤼팽 전집>(까치, 2003)이었다.
이후 당시 소실된 원고(<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중 9장 ‘금고’)를 추적했던 경험과 인맥을 토대로, 르블랑의 미발표 유작인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문학동네, 2012)을 프랑스 출판계의 공식발표 이전에 발견해두었다가 때맞춰 국내에 소개했고, 여기에 프랑스어 원본은 유실된 채 영역본만 남아 있던 단편 ‘부서진 다리’와 ‘아르센뤼팽의친구들협회’ 회보에 실린 두 편의 희곡까지 보태어 현존하는 뤼팽 시리즈를 망라한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아르테, 2018) 10권을 펴냈다.
그는 하나의 시리즈, 한 명의 작가, 나아가 한 장르를 “뿌리부터 가지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소개할 때 “뿌리부터 가지를 따라가며 재미를 탐독해가는 두텁고 풍성한 독자층”이 형성되리라 믿어왔다. 번역가가 본인의 취향에 맞는 더 재밌고 신선한 작품을 소개해주길 기다리는 독자, 신작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독자가 많아지면, “유명 수상작이 반짝 떴다 사라지는” 식의 출판문화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가 뤼팽 시리즈에 이어 끌린 ‘괴이하고 희귀하며 폄하된 것’은 문학 밖에서 더 명성이 자자한 사드의 작품이다. 책꽂이의 비(B) 그룹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사드는 “삶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쓴 작가”다. 출판사와 장기계약을 맺고 국내 최초로 ‘사드 전집’을 펴내기로 한 그는 “번역가로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드의 매력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힘쓸 참이다. 지금까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와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워크룸프레스, 2018)를 냈고, 지금 세 번째 작품을 번역 중이다.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사드 전집2: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사드가 1783년부터 2년간 옥중에서 두루마리에 쓴 장편소설. 성귀수 번역가는 “인간의 자의식과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불가능의 경계를 탐하는 문학. 여기서 파생하는 존재와 언어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일 또한 독서의 연장”이라며 권했다.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l 워크룸프레스(2018)
힘이 정의다
성귀수 번역가가 “인간 개체의 비타협적 자유를 기치로 기성 가치체계의 전복을 기도하는 시적 산문의 전방위적 선전포고”라고 표현한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세상에 공개되지 말았어야 할 5개 문헌’ 중 하나로 꼽은, 비판적 독서를 요구하는 책이다.
래그나 레드비어드 l 영림카디널(2015)
지혜와 운명
“느리게 읽고 깊게 생각하길 권하는 마테를링크의 주옥같은 산문집”인 <지혜와 운명>은 “척박한 세상에 인간의 자격으로 살아갈 지혜와 그 지혜를 무기로 운명을 주도해 나가는 인간의 영웅적 품격에 대한 자각”이며, 현대인을 위한 사려 깊은 위로다.
모리스 마테를링크 l 아르테(2017)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지식인의 정체성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의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헌.” 티소는 장자크 루소의 ‘절친’이자 주치의로, 지식인뿐 아니라 사회 각 계층의 생활습관,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병증에 관심을 기울여 의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사뮈엘오귀스트 티소 l 유유(2021)
성귀수 번역가를 경기 파주시 문산에 있는 그의 자택 작업실에서 만났다. 두 평 남짓한 작업실을 그는 자신의 “갑옷”으로 여긴다.
성귀수 번역가를 경기 파주시 문산에 있는 그의 자택 작업실에서 만났다. 두 평 남짓한 작업실을 그는 자신의 “갑옷”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