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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난히 팬 많던 아버지처럼 ‘능동적 번역가’ 되고파” [책&생각]

등록 2022-12-16 05:01수정 2022-12-16 10:59

번역가를 찾아서 | 이다희 번역가
아버지 덕에 입문 ‘당한’ 번역
토니 모리슨도 번역인생 스승
차별·억압 맞서는 책에 관심

지난 10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마련한 새 작업실에서 만난 이다희 번역가.
지난 10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마련한 새 작업실에서 만난 이다희 번역가.

이사한 지 열흘 남짓한 작업실은 조용하고 단출하다. 번역과 집필을 위한 아담한 책상 하나, 갓 내린 커피향이 솔솔 풍기는 낮은 탁자 하나, 한가운데 놓인 너른 탁자 하나. 번역가의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서 빼곡한 책장 대신 하얀 도화지 같은 벽면이 전부인 이다희 번역가의 작업실은 스스로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그가 “비우고 새롭게 채워낼” 공간이다. 여럿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널찍한 탁자는 영어 원서 읽기 모임을 열 생각으로 들여놓았다. 영어공부에 진심인 사람들과의 소통은 매일 아침 작업실에 출근해 홀로 번역에 몰두하는 그에겐 즐거운 쉼표일 뿐 아니라, ‘능동적인 번역가’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능동적인 번역가는 기획하는 번역가라는 의미예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좋은 책을 고르면서 제 독서경험이 더 풍부해질 테고, 좋은 책을 발견하면 출판사 측에 출간 제안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번역 일을 해나갈 생각이에요.”

이다희 번역가는 2004년 <아이네이아스>(국민서관)를 펴낸 이래 총 10권의 대작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휴먼앤북스, 2010~2015)과 카렌 암스트롱의 <신화의 역사>(문학동네, 2011), 메리 린 브락트의 <하얀국화>(문학세계사, 2018) 같은 굵직한 작품을 옮겼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토니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바다출판사, 2021)와 <타인의 기원>(바다출판사, 2022)을 최근 잇따라 펴냈다. 실력과 관록을 갖춘 그가 새삼스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번역가로 살려는 이유는 무얼까.

애초 그에게 번역은,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초·중·고교를 미국에서 다니고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철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전공하며 영어와 불어, 고전 라틴어, 고대 희랍어를 공부한 그에게 번역은 ‘일’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게다가 그는 저명한 번역가이자 작가인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랐고, 번역이 고된 데 비해 보수가 적은 일이라는 것과 제아무리 출중한 번역가라도 ‘오역 논란’의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 영어교육 전문기업과 주한미국대사관 등에서 일하며 ‘평범한 직장생활’을 선택한 그가 그 시기 내내 번역 일을 겸했던 건 딸의 재능을 외면하지 못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지난 12월10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이다희 번역가.
지난 12월10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이다희 번역가.

“아버지께서 감수를 맡으시고 번역은 제가 하는 걸로, 출판사와 계약을 여러 권 해버리셨으니 저는 번역가로 입문‘당한’ 셈이에요.(웃음) 번역을 해서 아버지께 보내드리면 원고를 일일이 다 봐주셨어요. 주석을 달아주시기도 하고, 아버지 스타일로 번역을 다시 해서 보여주시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별로 고칠 것 없다, 잘했다, 수고했다고 하셨죠. 저는 아버지가 딱 한 번 개설한 번역대학원의 유일한 수강생이었어요.”

아버지의 오랜 바람이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첫 권을 즐거이 함께 작업한 후, 이다희 번역가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리고 이후 6년간 홀로 작업해 총 10권을 완간했다. “번역은 매 순간이 결단이며 주장이고, 책임은 오롯이 번역가에 있다”는 번역관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지만, 당시까지도 그는 전업 번역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능동적인 번역가’를 결심하게 만든, 번역 인생 두 번째 스승은 유일한 흑인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이다.

“모리슨은 미국문학에서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어떻게 지워지고 미화됐는지 이야기해요. 동시에 흑인들이 억압받는 상황에서 백인문화는 또 얼마나 망가졌는지 짚어내지요. 돌이켜보면, 젠더평등이 여성은 물론 남성도 구원할 거라 설파하는 마이클 코프먼의 <남성은 여성에 대한 전쟁을 멈출 수 있다>(바다출판사, 2019)를 번역한 2018년쯤부터 세상과의 불화를 집요한 글쓰기로 풀어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바다출판사, 2022), 그리고 지금 번역 중인 미셸 오바마의 두 번째 에세이까지, 차별하고 억압하는 세상을 도발하는 책들을 옮기면서 더 좋은 책으로 독자와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던 것 같아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작가들과의 잇단 만남은, 또한 “번역은 번역가의 외로운 선택인 동시에 저자와 편집자, 책을 읽을 상상 속 독자와의 협업”이라는 걸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난달 작업실을 물색하던 이다희 번역가는 작업실의 용도를 묻는 부동산중개인에게 “번역을 하고 글을 쓸 것”이라고 답했고, 중개인은 반색하며 “우리 과천에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시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쓰신 이윤기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그분의 오랜 팬”이라고 했다. “제가 그분의 딸이에요”라고 밝히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는데, 순간 이다희 번역가는 유난히 팬이 많았던, 아버지 같은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타인의 기원

유일한 흑인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 그러나 “미국 정규 교과 과정에선 언급조차 되지 않는” 토니 모리슨이 쓰는 차별의 기원. 모리슨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고 썼다.

토니 모리슨 지음 l 바다출판사(2022)

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의 에세이, 연설, 학회발표 논문 등을 엮은 <보이지 않는 잉크>는 이다희 번역가를 “시험에 들게 할 만큼” 쉽지 않은 책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어내는 독자들만이 가져갈 수 있는 보석이 너무나 많이 숨어있는 책”이다.

토니 모리슨 지음 l 바다출판사(2021)

거실의 사자

평생 고양이와 함께 살아온 과학잡지 기자가 문득 고양이에 헌신하는 자신에게 의문을 느껴 집필을 시작했는데, 결국 인간이 망치고 있는 지구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고양이를 새롭게 바라보고 인간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책.”

애비게일 터커 지음 l 마티(2018)

남성은 여성에 대한 전쟁을 멈출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화이트 리본 캠페인’의 공동설립자 마이클 코프먼의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 입문서. 저자는 젠더 불평등이 남성에게도 역시 억압과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젠더 평등은 남성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마이클 코프먼 지음 l 바다출판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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