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l 휴머니스트(2021) 카타르월드컵에서 전통의 강호 아르헨티나와 독일이 각각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에 패배했다. 조별리그 예선에서 일본은 독일을 상대로 2 대 1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일본 대표팀 공격수 미나미노 다쿠미는 경기 후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를 앞둔 한국팀의 행운을 빌면서 “한국도 뭔가 특별한 일을 낼 능력이 있다.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구보 다케후사 선수 역시 같은 팀 동료였던 한국의 이강인을 언급하며 “이강인이 어제 문자를 보내 행운을 빌어줬다. 나도 똑같이 해줄 것”이라며 한국 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전이 벌어지던 무렵 한국의 소셜미디어에서는 반성한 전범 국가와 반성 하지 않는 국가 사이의 대결이라며 독일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일본과 비교해 독일을 과거사 청산에 앞장선 모범적인 국가라고 여기지만, 독일이 처음부터 그런 나라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은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기억의 모범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임지현 선생이 펴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따르면, 1946년에 실시된 미군 점령 지역 조사에서 전체 독일인 응답자 가운데 37%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기타 비아리아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고 응답했고, 세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5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도 역시 약 37%의 응답자가 “유대인들이 없는 것이 독일에 이득”이라고 답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독일인 다수가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한나 아렌트는 전후 독일인의 집단심성에 자리한 자기연민에 가득 찬 희생자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패전 이후 나치가 점령했던 유럽 전역에서 대략 1200만명의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 이들은 귀환 과정에서 혹독한 보복을 당해, 8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6천명 이상이 살해당했는데, 일본이 원폭 피해를 통해 스스로 희생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독일인 대다수도 죄를 지은 것은 나치와 그 하수인들이었고,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이자 마지막 희생자였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 독일 정치인들이 폴란드에 사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무렵 양국은 국경문제를 비롯해 여러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고, 국교 수립마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종전 20주년을 맞이한 1965년 11월18일, 스테파노 비쉰스키 추기경을 비롯한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 35명이 서명한 한 통의 편지가 독일(서독) 가톨릭교회 주교단 앞으로 도착한다. 편지에는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고 적혀 있었다. 전후 독일 피난민들이 피해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피해의 양적·질적 규모는 물론 침략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이 독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피해자인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독일에 먼저 용서를 구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독실한 가톨릭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교회의 용서에 대해 국가 내부에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폴란드의 용서를 시작으로 독일이 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70년 12월7일,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독일을 대표해 사과했다. 월드컵 축구에서 그렇듯 기적은 가끔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하려면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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