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온섭 5남매. 왼쪽부터 큰누나 양섭, 작은누나 완섭, 큰형 홍섭, 작은형 주섭. 홍섭이 아기인 온섭을 안고 있다. 1939년 촬영된 유일한 형제들 사진이다.
큰형은 보도연맹으로 학살됐다. 작은형은 월북을 시도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둘째 누이는 미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큰매형은 빨치산 활동으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좌익활동에 연루돼 경찰에 고문을 당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었다. 충북 괴산에 사는 박온섭(82)씨가 겪은 한국전쟁이다. 충북도의원을 지낸 박씨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박동수는 청천면 송면리에서 논 20마지기(1만3200㎡)와 담배밭 13마지기(8580㎡)를 가진 부농이었다. 일꾼도 여럿 있었다. 큰형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는 1942년 청주농업학교를 나와 부산에서 축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충북도청 축산과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큰형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1940년대 후반 공무원을 그만두고, 박씨의 첫째 사위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1948년 둘째 형이 월북을 시도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나이 10살 때였다. 이듬해인 1949년 첫째 형이 경찰에 붙잡혔다. 괴산경찰서는 1949년 10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박씨와 두 누나를 연행해 고문했다. 모진 구타와 고문 끝에 누나들은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6개월 동안 청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뒤 1950년 4월에야 풀려났다.
박온섭이 한국전쟁 당시 집의 창고로 쓰던 건물 앞에 서 있다.
경찰에 체포된 뒤 전향한 큰형은 그사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만들어준다며 이승만 정부가 주도해 꾸린 전국적 관변단체였다.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군경이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큰형은 청주의 보도연맹원 소집으로 집을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다.
큰형이 7월10일 청원군(현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분터골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지였다. 박만순 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은 “분터골 민간인 학살 목격자와 가해자 조사 때 박씨의 첫째 아들이 피해자로 확인됐다. 미신고자로 보고서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1950년 7월 중순 충북 괴산군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와 내무서(경찰서)를 만들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동네 노인들이 아버지 박씨를 찾아와 인민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사정했다. 아버지는 송면리 인민위원장으로, 첫째 딸은 여맹(여성동맹) 위원장으로 각각 임명됐다. 박씨 부녀는 북한군의 지시로 애국미를 걷고 농작물 실태조사 등을 수행했다. 아버지는 의용군을 모집하는 인민군의 재촉에 “동네 일손이 없어서 힘들다”고 둘러대며 마을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박온섭이 큰형 홍섭의 청주농업학교 졸업증서를 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군경은 1950년 9월 말 괴산군을 수복했다. 아버지는 애국미 80여가마를 숨겼다가 북한 인민군 퇴각 뒤 동네 근처에 주둔한 국군과 마을 주민한테 나눠주었다. 덕분에 이들 부녀는 수복 뒤 부역 혐의로 또다시 고초를 겪진 않았다.
잠시 물러간 듯한 비극은 이윽고 다시 그들을 찾아왔다. 12월, 집에 들이닥친 미군들이 둘째 누이를 “조사할 것이 있다”며 데려갔다. 누나는 18살이었다. 아버지 박씨가 “밤에 무슨 조사를 하냐”며 막아섰다. 군인들은 총과 완력으로 박씨를 제압한 뒤 울며 몸부림치는 둘째 딸을 끌고 갔다. 미군들한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둘째 누이는 처참한 몰골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딸의 모습에 통곡했다. 박씨는 둘째 딸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살피라고 말했다. 당시 12살이던 박온섭씨는 “둘째 누나 말고도 이평리·송정리 등 이웃 동네에서도 여러 처녀가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일부 처녀들은 근처 산골짜기로 몸을 피했다”고 말했다.
1951년 새해부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두 아들(둘째 아들은 이후 생환)과 첫째 사위의 행방불명, 미군들한테 성폭행당한 딸, 빨갱이 집안이라는 멸시를 견디지 못해 화병이 난 것이었다. 1년 동안 앓던 어머니는 그해 12월4일 숨졌다. 박온섭씨는 “돌아가시기 전 한달 동안 정신을 잃었고, 온몸이 붓더니 결국 돌아가셨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다. 고생만 했다. 화병”이라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1952년 북한 인민군과 함께 활동했던 첫째 매형이 처가에 들렀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미군한테 성폭행당한 둘째 누나는 인근 마을 청년과 서둘러 혼인했지만 아이 둘을 남긴 채 1959년 결국 스스로 삶을 끝냈다.
박온섭이 한국전쟁 당시 집의 창고로 쓰던 건물 앞에 서 있다.
박씨가 송면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배워도 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지게질을 시켰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담배 농사를 지었다. ‘빨갱이 집안 자식’ 손가락질을 참기 어려웠던 박씨는 17살 때 고향을 떠나 충주 공장에 들어갔지만 며칠 뒤 경찰이 찾아오는 바람에 공장에서 쫓겨났다. 약국, 음식점 등의 직원으로 취직했을 때도 경찰에 쫓겨 일을 그만둬야 했다. 지독한 연좌제였다. 선원이 되려고 부산에 갔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다. 박씨는 “다른 집 형들은 동생을 챙겨주기 바쁜데, 우리 형들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원수로 생각했다. 분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1974년 아버지가 숨진 뒤 방황했던 박씨는 연좌제의 족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답답한 처지가 억울해 남을 해치려는 나쁜 생각도 했다. 계속 당하다 보니 오기가 생겼고, 국회의원을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동네 크고 작은 일에 앞장섰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지역 정치권의 문을 두드렸다. 1975년 괴산군 행정자문위원으로 일했고, 1981년 2월, ‘체육관 선거’인 대통령선거인단에도 당선돼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1988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위촉, 1995년 민주당 충북도당 부위원장에 이어 제5대 충북도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고 나니, 보안 당국에서 더 이상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빨갱이 꼬리표도 사라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직한 것이 도의원”이라고 말했다. 현재 박씨는 화양서원 등 지역 문화재 복원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가 큰형을 괴산군 피해자로 확인했지만, 박씨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 “70년 동안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속으로 삭이고 살았다. 그렇게 오늘까지 버텼다. 괴롭던 옛일을 다시 떠올리기가 힘들다”고 한 그는 한국전쟁 70주년의 회한을 묻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처럼 말했다. “전쟁으로 많은 양민이 피해를 입었고 희생됐다.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 유족의 억울함을 완전히 풀어줬으면 좋겠다. 열강의 흥정으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고 결국 동족끼리 싸웠고, 지금도 총을 겨누고 있다. 민족이 하나로 뭉쳐 다 같이 용서하고,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
괴산(충북)/글·사진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