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오라2동 정실마을 도로변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허호준 기자
1978년 6월3일 제주시 오라2동 정실마을 주민들은 새로 단장한 도로변에 나와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도로 양쪽에는 갓 심은 구실잣밤나무들이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오라관광단지 개발 사업 현장으로 가기 위해 이 도로를 지나갈 참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일행은 일정을 바꿔 서쪽 항몽유적지로 갔다. 대통령을 맞으려고 45년 전 주민들이 심은 구실잣밤나무는 정실마을의 상징이 됐다.
정실마을 월정사에서 신제주 케이시티브이(KCTV) 남쪽으로 이어지는 아연로변에는 수령이 50년이 넘은 구실잣밤나무 75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키가 10m가 넘는데다 여러 갈래로 뻗은 줄기가 도로 위를 덮어 숲 터널을 이룬다. 굵은 몸통에 이끼가 내려앉고 풀이 자라는 나무도 있다. 겨울이 되어 다른 곳의 나무들은 이파리를 떨구지만 구실잣밤나무는 여전히 푸르다.
제주시 정실마을 구실잣밤나무 가로수에 이끼가 끼고 풀이 돋아났다. 허호준 기자
11일 오전 정실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홍신생(83) 노인회장은 “당시(1978년) 대통령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해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을 했다. 그때 심은 구실잣밤나무들이 자라서 저렇게 크고 멋진 나무가 됐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대통령이 지나간다는 말에 주민들은 도로변에 있던 돗통시(돼지우리가 붙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를 모두 없애 ‘개량변소’로 만들고, 지붕에 페인트칠하는 등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홍 회장은 “그때는 시청 과장이 우리 동네에 와서 직접 주택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고, 새마을과 직원들이 우리 동네에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대통령 일정이 바뀌어서 지나가지 않아 조금은 허탈했다”고 웃었다.
이 도로에서 더 내려가면 만나는 해병대 부대~케이시티브이 구간에는 마른 왕벚나무 가지들이 차도를 향해 뻗어 있다. 봄철 벚꽃이 만개하면 분홍빛 꽃터널이 만들어지고 아래를 지나는 차에선 탄성이 터진다. 왕벚나무는 1980년대 중반 식재됐는데, 심을 당시에 이미 다 자란 성목이었다.
19살에 정실마을에 시집온 홍아무개(74)씨는 “그때 이미 나무가 다 자라서 상당히 보기가 좋았다. 이제는 나무가 너무 커서 1년에 두번 이파리가 떨어지면 치우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홍 회장은 “봄이 되면 나무에서 나는 냄새가 고약해 가로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며 “사실 지금도 오후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을 앞부터 신제주 입구까지 차량 정체가 심해 도로를 넓히기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케이시티브이 남쪽∼해병대 부대 구간 가로수로 심어진 왕벚나무가 지난 4월 만개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정실마을 앞 도로를 45년간 지켜온 구실잣밤나무들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제주시가 도로 확장 사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시는 내년 상반기 아연로(정실마을~케이시티브이 남쪽) 2.2㎞ 구간에 대한 도로 확장 사업에 들어갈 예정인데, 가로수 처리 문제를 놓고 고민이다. 시는 케이시티브이에서 민오름 서쪽 연동 경계지까지 600m 구간과 월정사에서 오라2동 경계지까지 1.6㎞ 구간 등 2개 구간으로 나눠 공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도로 폭 10m인 지금의 왕복 2차선을 20m 폭의 왕복 4차선으로 늘리는 공사다.
이 도로는 현재도 출퇴근 시간이 되면 차량정체가 심한 구간이다. 시는 앞서 지난해 산광교차로~도두 간 도로구조 개선 사업을 하면서 제성마을 주민들이 심은 왕벚나무를 벌채했다가 지역주민들과 시민들의 항의로 곤욕을 치른 바 있어 이번 도로 확장과 관련해 가로수 처리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손태수 제주시 도시시설팀장은 “내년 상반기 (도로 확장) 착공을 목표로 실시설계 용역 중이다. 가로수 문제 등을 조만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처리 방침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제주시 오라2동 정실마을 도로변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허호준 기자
제주시 케이시티브이 남쪽~해병대 부대 구간에 심어진 왕벚나무 가로수길. 허호준 기자
환경단체들은 가로수 제거 계획에 반발한다. 제주참여환경연대는 “기후위기 시대에 가로수는 시민과 함께하는 소중한 존재”라며 “제주시는 교통 편익만을 앞세워 도로 확장에 매달릴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마을과 함께해온 가로수들과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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