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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고아, 팔순 바라보는데…새삼스런 ‘4·3 폄훼’에 울컥

등록 2023-04-02 18:13수정 2023-04-03 17:11

4·3 75돌 앞두고, 학살주도 서청 후예 자처 단체 활동
극우 단체, 북한 연루설 주장하며 추념식장 시위예고
제주큰굿보존회 회장 서순실 심방이 2일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 제주주정공장 옛터에서 4·3행방불명자들을 위한 ‘제주 큰굿 붓시왕맞이’ 굿을 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제주큰굿보존회 회장 서순실 심방이 2일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 제주주정공장 옛터에서 4·3행방불명자들을 위한 ‘제주 큰굿 붓시왕맞이’ 굿을 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안나오민 죽이켄허난 산에 곱았던 사람들이 나와수다. 어린 애기고 어른이고 모두 하산허난 주정공장에 심어왕 말한마디 못하고 죽은 영혼들도 이수다. 배 안에 데려온 애기 이기서 탄생하고, 이기서 살지 못행 서천 꽃밭에도 가수다. 배탕 육지래도 보내 불고, 바당에 들이쳐부러수다.”(‘나오지 않으면 사살한다’고 하자 산에 숨었던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하산하니 주정공장에 잡아와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임신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기를 낳고, 여기서 죽어 서천꽃밭에 간 어린 영혼들도 있습니다. 배를 태워서 육지 형무소로 보내버리고, 바다에 수장하기도 했습니다.)

2일 오전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 제주주정공장 옛터에 만들어진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 공원에서 제주큰굿보존회 회장 서순실 심방이 4·3굿을 위해 청하는 내력을 읊었다. 이를 보던 유족들이 하나둘 눈시울을 붉혔다. 주정공장은 4·3 시기 최대 수용소로, 귀순한 제주도민들이 수용됐다가 다른 지방 형무소로 끌려가거가나 바다에 수장되는 등의 아픈 역사가 서린 장소이다.

행방불명희생자 위령제로 치러진 ‘제주 큰굿 붓시왕맞이’는 초감제와 시왕맞이를 붙여 하는 굿으로,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곱게 데려가서 극락왕생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2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4·3 희생자 유족 김영자씨가 위패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2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4·3 희생자 유족 김영자씨가 위패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이날 심방은 굿을 집전하는 내내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거나 바다에 수장된 영혼들을 불러내어 울먹였고, 이에 유족들도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훔쳤다.

제주 4·3 75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 제주도 곳곳에서는 유족과 도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4·3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이어 제주시 동회천 마을 등에서는 마을 단위 4·3위령제가 열렸다.

이와 함께 이날 오전 10시 제주시청 일대에서는 민주노총이 주최하고 민주노총 제주본부가 주관한 ‘4·3 민중항쟁 75주년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에서 2천여명의 노동자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들은 이날 투쟁 결의문을 통해 “다시 항쟁의 기억이 피어나는 4월 제주다. 75년 전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벗어나 평등과 통일독립을 열망한 제주민중의 꿈은 여전한데 세상은 거꾸로 돌아간다”며 “4·3을 폄훼하는 극우세력의 현수막이 나부끼고 학살자 서북청년단이 부활을 기도하면서 극우 파시즘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살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는데 이제는 일만 하다 죽으라고 무한 노동을 강요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과 각명비, 행방불명인 표석에는 유족들의 발걸음이 종일 붐볐다.

2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4·3 희생자 유족들이 위패를 가리키고 있다. 허호준 기자
2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4·3 희생자 유족들이 위패를 가리키고 있다. 허호준 기자

“목숨이 질엉 살안. 말로 고랑 몰라. 울 생각이 어서”(목숨이 길어서 살았다. 말로 이야기해서 모른다. 울 생각이 나지 않는다)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만난 김홍빈(78·제주시 도두동)씨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과 함께 위패봉안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찾던 김씨는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가자 어머니가 3살짜리 나를 업은 채 쫓아갔다. 주위에서 아기라도 떼어놓으라고 해서 보릿짚에 나를 내려둔 채 그대로 끌려가 부모님 모두 희생됐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씨의 형 김응빈(84)씨는 “부모님이 1949년 1월14일 돌아가셨다. 동생이 생후 26개월 때였다. 그다음부터 삶이 어떻게 됐겠냐”며 “부모님이 그렇게 끌려가 돌아가시고, 18살 큰형님도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고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가 6·25가 발발해 행방불명됐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서청 후예를 자처하는 단체가 시위한다는 말에 “그 소식을 듣고 목이 탁탁 막힐 정도였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2일 제주시 동회천 마을에서 열린 4·3 위령제. 허호준 기자
2일 제주시 동회천 마을에서 열린 4·3 위령제. 허호준 기자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혼자 온 김영자(82)씨는 “ 추념식이 열리는 내일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 복잡할 것 같아서 미리 왔다”며 준비해온 고기적과 떡, 술을 위패 앞에 놓고 연신 두 손을 모았다. 김씨가 가리키는 위패는 아버지와 큰오빠, 둘째 오빠의 위패였다. 아버지 김옥평(당시 48살)은 선흘리에서 토벌대에 끌려가 함덕 해수욕장 부근에서 희생됐고, 19살 둘째 오빠는 마을 부근의 굴에서 죽었다. 22살 큰오빠는 육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 김씨는 “어머니가 큰오빠가 꼭 돌아올 것이라며 형무소에 끌려간 이후 30년을 기다렸다. 그 긴 세월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때야 사망신고를 했다”며 “오빠 둘 다 젊었을 때 돌아갔는데 국가 보상금이 나온들 목숨이 돌아오느냐. 보상금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주관으로 위령제례가 봉행됐고, 오후 5시부턴 75주년 전야제가 제주시 아트센터에서 진행됐다.

제주4·3평화공원 인근 도롯가에는 최근 우익정당과 단체들의 4·3폄훼에 맞서 이를 비판하는 각종 펼침막이 내걸렸다. 허호준 기자
제주4·3평화공원 인근 도롯가에는 최근 우익정당과 단체들의 4·3폄훼에 맞서 이를 비판하는 각종 펼침막이 내걸렸다. 허호준 기자

이날 제주4·3평화공원으로 가는 길가에는 예전의 4·3추념식과는 달리 ‘4·3 폄훼’를 비판하는 각종 펼침막이 내걸렸다.

‘4·3 학살자 서북청년단, 제주도는 잊지 못한다’, ‘극우 정당의 망언을 규탄한다’, ‘서북청년단! 너희들의 죄는 하늘도 땅도 안다’ ‘4·3왜곡 선봉장 태영호는 사퇴하라’ 등의 펼침막 수십여장이 평화공원 주변에 나붙었다.

이들 펼침막은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월13일 제주 합동연설회에서 느닷없이 ‘4·3은 북한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됐다’는 주장을 시작으로 우익정당과 단체들이 계속해서 허위 주장을 편 것에 맞서 제작한 것이다. 급기야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라는 이름의 단체가 4·3 추념식이 열리는 당일 4·3평화공원 부근에서 집회하겠다고 신고까지 한 상태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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