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의 광천시민아파트에서 ‘들불야학’의 흔적을 더듬었던 <한겨레> 2017년 5월20일 1면 기사.
그젠 장마 뒤끝이라 날씨가 꾸무럭하더라구요. 오랜만에 광주 유스퀘어터미널 건너편 광천동엘 갔어요. 5천여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곳이랍니다. 다닥다닥 붙은 상가와 인근 주택들 틈에 시민아파트라는 곳이 있습니다. 허름한 ‘서민 아파트’예요. 하지만 광주 5·18 항쟁과 현대사에서 역사적 상징성이 큰 공간이랍니다. 광천동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재개발조합) 사무실에 가기 전 시민아파트를 둘러봤어요. 적막하게 서 있는 시민아파트가 재개발의 폭풍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안녕하세요. 전국부에서 광주지역 취재를 담당하는 정대하입니다. 오늘은 시민아파트 이야기를 한번 하려구요. 시민아파트는 도시건축사적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에요. 광주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184가구)거든요. 1969년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살았던 판자촌을 허물고 지은 연립주택이에요. 말이 아파트지, “아궁이 딸린 쪽방(10평)”이었어요. ㄷ자 3개 동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층마다 공동세면장과 공동화장실이 있었어요.
시민아파트의 공동체성을 처음으로 주목했던 문화기획자는 임인자 감독이었어요. 2013년 2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창작레지던시 ‘도시횡단 프로젝트 광주’라는 프로그램의 감독을 맡아 이 아파트에서 판을 벌였어요.(
<한겨레> 2월15일치 14면) 시민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살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펼치고, 옥상에선 작은 음악회도 열었답니다. 공동창고와 공동텃밭이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 공간을 통해 “오늘날 공동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 의미를 나누고 싶다”던 기획 취지가 인상적이었어요.
시민아파트는 호남권 최초의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의 근거지였지요. 박기순이 주도한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시민아파트 나동 인근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1월 시민아파트 다동 2층 방으로 옮겼답니다. 들불야학은 출발 때부터 대학생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의미로 ‘강학’으로 불렸어요. 노동자 학생들을 지칭하는 ‘학강’엔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유스퀘어터미널 자리에 있던 광천공단 공장에 다니던 젊은 노동자들이 들불야학을 찾았지요.
들불야학은 5·18을 만나면서 항쟁의 뜨거운 밑불이 됐어요.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은 시민아파트 나동에 사글셋방을 얻어 생활했답니다. 은행을 그만두고 광천공단 한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던 그는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에 참여했어요.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5·18 민중언론 <투사회보>가 제작된 곳도 시민아파트랍니다. 마지막 새벽 윤상원·박용준이 총에 맞아 숨졌고, 5·18로 삶이 바뀐 들불야학 강학 김영철·박관현·박효선·신영일이 들불처럼 살다가 세상을 떴어요. 1982년 영혼결혼식을 올린 윤상원·박기순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시민아파트의 역사성에 주목한 언론인은 <한겨레> 이문영 기자입니다. 그는 들불야학과 5·18, ‘임을 위한 행진곡’을 품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처음으로 정밀하게 포착한 기사(
<한겨레> 2017년 5월20일치 1면)로 감동을 줬어요. 그때 사진부 강재훈 기자가 찍은 시민아파트 사진은 지금 봐도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3년 전만 해도 시민아파트는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어요. 시민아파트 공간에 담긴 역사를 한땀 한땀 기록한 ‘임을 위한 진혼곡’의 기사에도 “2019년 시민아파트가 철거될 예정”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홍 등 광주의 작가들이 2017년 7월 시민아파트의 역사적 의미를 환기하는 게릴라 퍼포먼스를 해요.(
<한겨레> 2018년 7월23일치 14면) 서대석 광주 서구청장은 시민아파트 예술가 게릴라 퍼포먼스가 열린 뒤 자문단을 꾸려 시민아파트 보존 방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시민아파트가 위치한 서구의 행정 책임자 서 청장이 들불야학 강학 출신의 정치인이라는 점입니다.
보존·철거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서구청은 2018년 12월께부터 ‘광천동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과 보존 방안을 협의해왔어요. 재개발조합에 시민아파트 세 동 중 한 동(나동)만을 보존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재개발조합은 “이미 인가된 사업계획이 변경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정이 지연되지 않고 조합의 이익이 추가로 발생하는 변경안이 나온다면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광천동 거대한 아파트 숲 안에 시민아파트 한 동을 포함한 ‘역사공원’이 조성돼 광주의 아름다운 빛을 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