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날 그사람들③ 80년 5월23~27일 목포역 광장집회 주도 목포는 광주 진압 뒤 시민항쟁 최후 거점 빨갱이 폭도 고문 속 2년형 선도 뒤 출소 한신대 졸업 뒤 광주로 가 빈민운동 참여 “신혼 집이 탁아소, 딸과 함께 같이 키워” 보안사 사찰 폭로 윤석양 이병 도피 도와 미국서 16년 동안 평화운동·노숙자 돕기도 올 2월 한신대 이사장 맡아 평화대학 다짐
1980년 5월 목포역 앞에서 목포시민의 거리행진을 이끌고 있는 박상규 목포시민 민주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
“버티자니 죽음이 어른거렸고, 싸우자니 맨주먹뿐이었습니다.”
1980년 5월27일 오후 3시. 전남 목포역에서 목포시민 민주투쟁위원회 대책회의가 열렸다. 몇시간 전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육전이 벌어진 뒤였다. 이제 목포 차례였다. 헬기는 상공을 낮게 돌며 위협했다.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격론 끝에 “살아서 역사 앞에 증언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5·18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지였던 목포의 해산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지도부는 이날 저녁 집회를 마지막으로 진행하고 흩어지기로 했다. 5차 집회를 마치고 횃불행진이 진행됐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행진 도중 유달산 노적봉으로 올라갔다.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시내로 나갔다가 목포역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울면서 지켜봤다.
5월28일 새벽 2시 횃불들이 꺼지고 선배 집을 찾아가 새우잠을 잤다. 뒤척이다 일어나 보니 목포역 상황이 너무 궁금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목포역을 2㎞쯤 남기고 도로를 건널 때 누군가 “박상규” 하고 불렀다. 무심코 “네” 하고 대답했다. 득달같이 사복들이 덮쳤다. 곧바로 대기 중인 지프에 실렸다. 들이댄 권총의 총구가 차가웠다.
목포에선 5월22~27일 시민 1만여명이 운집한 궐기대회와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광주에서 군인이 무고한 시민한테 총격을 가했다는 소식에 누구라도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도나도 시위 대열에 합류해 ‘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을 외쳤다. 그 틈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1990~9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때 서울에서 벌인 공안통치 종식 시위.
“5·18은 운명을 완전히 바꾸었어요. 마치 성경의 ‘다메섹 도상’(다마스쿠스 가는 길 위. 기독교 박해에 나섰던 바울이 예수를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극적 전환을 이룬 계기)처럼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체포된 뒤 경찰서와 군부대를 거치며 수없이 몽둥이에 맞고 구둣발에 차였다. 초주검 상태가 됐다. 여기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없이 두려웠다. 맞고 또 맞으면서 아무런 주장도 못 하는 데 절망을 느꼈다. 며칠 뒤 헬기에 실려 광주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거의 보름 동안 다시 온몸에 날아드는 몽둥이와 발길질을 견뎌야 했다.
“그들은 집요하게 물었어요. ‘너 빨갱이지’, ‘정동년한테 돈 얼마 받았어.’ 나중에 보니 김대중 내란음모에 엮을 줄거리를 꿰맞추고 있었나 봐요.”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상무대 영창에 갇혔다. 군사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죄목은 애초 포고령 위반에서 내란 중요임무 종사나 부화뇌동 등으로 멋대로 바뀌었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혐의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도 했다. 이런 재판을 받으면서 사회적 성취라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성공하고 출세해서 선한 사람을 핍박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해 10월쯤 열린 1심 선고 때 일이다. 방청석에 앉았던 아버지께서 재판에서 나온 혐의들이 하도 어이가 없었던지 단말마처럼 외쳤다. “상규야, 너는 절대 거짓말하지 말아라.” 교사 출신인 아버지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씀을 서슬 퍼런 재판장·법무관 앞에서 아들을 향해 소리쳤고, 그 한마디는 아직도 죽비 소리처럼 뇌리에 남아 있다. 비좁은 영창에서 고통을 나눴던 동료들도 깨우침을 주었다.
2013년 7월,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의 캄포트마을에 설치한 우물 앞에서 주민들과 기념식을 열었다.
“늘 배고팠어요. 더 먹으려고 실랑이가 난 적도 있어요. 누군가 ‘우리끼리 이래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지요. 다음 끼니부터 ‘내 한술 덜어 남 한술 주기’를 시도했어요. 얼마 후 사동 전체로 번지는 걸 보고 울컥했지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수감 생활 중 “출소하면 낮은 곳에서 약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건축가의 꿈을 접고 목회자의 길을 그리기 시작했다.
체포처럼 석방도 갑작스레 다가왔다.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신군부가 5·18을 광주만의 일로 축소하고, 수감자를 줄이기 위해 무더기 석방을 단행했다.
투옥 6개월 만에 풀려나 목포 연동교회로 갔다. 학창 시절 다녔던 연동교회는 목포지역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강신석·이철우 목사, 안철 장로 등은 청년들한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연동교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디딤돌을 놓아주었다.
교회 추천을 받아 한신대 교역과에 들어갔다. 서남동·안병무·문익환·문동환·고재식 등 최고의 스승들한테 열심히 배웠다. 해직자 학생이었던 윤영규·명노근 등 선배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재학 시절 경기 하남의 동부선린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성가대를 지휘하다 피아노 반주를 하는 여성을 특별하게 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1976년 12월 목포고등학교 졸업 직전 친구들과 찍은 사진(오른쪽 뒤).
85년 한신대를 졸업하자 조아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장한테 요청이 왔다. 5·18에 참여했던 광주 학동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으니 도와야 한다고 했다. 도시 빈민운동이었다. 군말 없이 월드비전 광주빈민지역 가정개발사업장 사무장으로 갔다. 함께 가면 힘이 날 것 같아 마침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 여성한테 청혼하는 용기를 냈다. 광주 학동의 허름한 중국집을 전세 400만원에 얻었다. 거실과 식당을 터서 낮에는 탁아소, 밤에는 신혼방으로 삼았다. 딸이 태어나자 이웃 아이 26명과 함께 똑같이 길렀다. 주민의 건강을 돌보는 진료활동도 조직했다. 인근 전남대 의대의 학생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남광주청년연합을 꾸려 청년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3년 만에 폐결핵이 찾아왔다.
학동의 빈민운동이 궤도에 오를 무렵인 88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여천중부교회로 발령받았다. 여수국가산단 부근의 개척교회였다. 노동자 인권 상황을 살피며 서서히 건강을 회복해갔다. 2년 동안 여천에서 신앙공동체의 기반을 다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간사로 파견됐다.
또 한번의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9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터졌다. <한겨레>에서 양심선언을 한 윤석양 이병의 도피를 책임져야 했다.
2016년 12월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관 광화문 시국기도회.
“하필이면 또 나야, 잡히면 또 맞고, 또 갇히고…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5월에 살아남은 자의 부채를 이걸로 갚을지 모르지. 한번 더 죽자 했어요.”
윤 이병은 용케 붙잡히지 않았다. 1년 뒤 부산에서 체포됐을 때 당국은 이를 끄집어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미행도 그제야 떨어졌다.
위기를 넘기고 96년 5·18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권호경·김상근·강신석·박종화 목사 등이 등을 토닥이며 격려해주었다. 대학원에 다니며 동포사회에서 6·15 남북정상회담 기념행사를 여는 등 한반도 평화·통일운동에 부지런히 참여했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어우러진 동포사회였지만 조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목사로 일하면서도 도심의 노숙자한테 무료로 저녁을 제공하고 국제결혼한 이주여성의 가족을 보살피는 활동을 하는 등 5월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2010년에는 풀러신학대에서 논문 ‘세속화 시대의 교회문화사역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생활 16년 만인 2012년 광주에서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광주시 남구 봉선동 성광교회의 담임목사로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2016년 12월24일 광주 동구 금남로의 촛불집회.
“광주는 늘 그리웠던 도시였죠. 남은 인생을 초심대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고 한반도의 평화를 앞당기는 데 바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25년 만에 돌아온 광주는 예전의 활력과 열정이 고갈된 듯 보였어요. 광주는 저항의 ‘마사다’(유대인의 최후 항전 요새)만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무지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누구인가 고민해봤다. 장애인과 고려인, 이주민 등으로 압축이 됐다. 우선 교회에 다니는 장애인 2명을 위해 승강기를 설치했다. 비용이 부담스러웠지만 주일마다 목말을 타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다. 외롭고 고되게 살아가는 월곡동 고려인 마을 주민들을 초대해 식사하고 어울리는 송년행사도 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뿐 아니라 다른 체제 출신인 이들과 동행할 수 있어야만 통일 이후의 공존도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의 이웃들한테도 손을 내밀었다. 2013년 캄보디아 캄포트마을에서 우물을 파고 담장을 쌓은 것을 시작으로 필리핀, 동티모르, 라오스, 네팔, 몽골, 방글라데시 등의 빈민촌이나 난민촌을 지속해서 찾았다. 이 마을들을 7년마다 순회하며 공동체 운동을 펼쳐보려 한다.
2019년 4월27일 철원 노동당사 앞 한반도 평화 기원 인간띠 잇기 행사.
“‘너 빨갱이지’라는 말을 들었지만 분단 극복과 한반도 평화를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박해를 받더라도 그게 옳은 길이면 가야 한다고 믿었죠. 미국에서도 평화포럼을 조직하고 광주에서도 비무장지대 걷기, 인간띠 잇기 등으로 통일의 씨앗을 심으려 애씁니다. 앞으로 북한의 마을 한곳과 결연해 서로 돕는 사업을 펼치려 합니다.”
지난 2월 한신대 이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더 넓은 데서 5월 정신을 구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신대를 미래의 참지도자를 만드는 평화대학으로 육성하고 싶다. 5·18을 잘 모르는 청년들한테 선한 나눔을 들려주는 사명을 잊지 않으려 한다.
“80년 광주에는 숭고한 인간주의가 있었습니다.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주먹밥을 나누었듯이 지금 마스크를 나누어야 합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