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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 밑불 5·18, 광주를 넘어 ‘촛불들’과 연대해야

등록 2020-01-01 05:00수정 2020-01-01 10:08

40돌 맞는 5·18민주화운동
40년 흘러도 진실은 아직
그날의 부채의식은 민주화 동력
‘광주만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사회문제·소수자 운동과 연대를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신군부의 권력 찬탈에 저항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돌을 맞았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국회 청문회(1988년), 검찰 수사(199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2018년) 등 네차례의 정부 차원 조사가 이뤄졌지만, 최초 발포와 집단 발포 명령자, 행방불명자 규모와 암매장 의혹, 민간인 학살, 미국의 역할 등과 관련한 실체적 진실은 규명되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더불어 5·18을 광주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역사로 만들 전국화와 계승 문제도 중요하다. ‘5·18 40돌’의 의미와 과제를 짚었다.

“타, 다닥….”

총소리가 어스름한 새벽의 정적을 깼다. 1980년 5월27일 새벽, 시민군 박천만(60)씨는 계엄군을 향해 총을 겨눴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총을 버리고 투항한 그는 옛 전남도청 민원실 2층 강당 옆 베란다까지 뻗어 있던 가문비나무를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그의 발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계엄군의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주변엔 동지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당시 30살)도 민원실 2층 강당에서 싸우다가 총을 맞고 산화했다.

1980년 5월27일 최후항전에 나섰던 시민군 박천만(60)씨가 지난 12월11일 39년 만에 처음으로 옛 전남도청 민원실 2층을 찾았다. 정대하 기자
1980년 5월27일 최후항전에 나섰던 시민군 박천만(60)씨가 지난 12월11일 39년 만에 처음으로 옛 전남도청 민원실 2층을 찾았다. 정대하 기자

그는 제과점에서 일하다가 80년 5월을 맞았다. 임신 아홉달인 아내를 둔 가장이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전날 밤, 누군가 “내일이면 공수부대가 들어온다. 살고 싶으면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박씨는 남았다. “다 가버리면 도청은, 광주는 누가 지키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계엄군에 붙잡혀 극심한 고문을 당해 한쪽 청력을 잃었다. 40여일 만에 그들 손에서 벗어났다. 한때 자살을 기도했지만, 죽지 못했다. 지난 12월11일 옛 전남도청에서 만난 그는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평생 마음의 짐이 됐다”고 회고했다.

일용직 벽돌공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그는 삶이 힘겨울 때마다 가문비나무와 대화를 나눈다. ‘니는 그날의 진실을 다 알고 있지?’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 광장. 대안신당 제공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 광장. 대안신당 제공

광주 대인시장 리어카 과일상 하문순(71)씨는 5월을 주먹밥으로 기억한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시장 상인들이 주먹밥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주먹밥과 총은 광주 ‘저항공동체’의 상징이다. 하씨는 “그때 시장 저기 방앗간 할매가 ‘도청 학생들이 고생한다’고 걱정해 상인 7~8명이서 주먹밥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가마솥에 찐 밥을 넣고 소금과 참기름을 섞어 만든 주먹밥을 상자에 넣어 시위대에게 보냈다. 하씨는 텔레비전에서 홍콩 시위 장면을 볼 때면 오월을 떠올린다. “거그서도 전쟁이 났드마. 그때 ‘광주사태’도 영락없이 홍콩과 똑같앴어.”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시위대와 시민군에게 건넬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시위대와 시민군에게 건넬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10일(5.18~27)간의 항쟁 마지막 새벽, 죽음을 각오하고 광주를 지킨 ‘희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심어줬다. 이 부채의식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동력이 됐다. 5·18은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부활했고, 1997년 4월, 12·12 쿠데타와 5월 학살자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소차에 실려가 망월동 구묘역에 묻혔던 희생자들의 주검은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됐고, 5월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에 맞서 진실을 밝힐 책무가 있다. 김정호 변호사는 “5·18 왜곡과 폄훼가 국민통합을 가로막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하루빨리 출범해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5·18 진상보고서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 40년, 내부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것도 중요한 때가 됐다. 5·18항쟁 기념행사가 피해 당사자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관료화되면서 감동은 반감됐다. 지난달 5월단체들의 차기 회장 선출 과정에서 회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며 잡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시민군 기동타격대 대원 나일성(59)씨는 “작은 이익 때문에 서로 반목하는 5월 동지들 모습에 실망을 느끼곤 한다. 5월단체들이 자성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5·18의 전국화도 숙제다.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산화한 김의기(1959~80) 열사의 누나 김주숙(64·부산)씨는 “해마다 남편 박철 목사와 광주를 찾아 5·18 기념 예배를 올리고 있다. 부산에선 5·18을, 광주에선 부마항쟁을 더 챙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과)는 “5·18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용기를 보여줬던 5·18도 제주 4·3, 부마항쟁 세력과 연대하는 제도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계승을 위해선 5·18이 새로운 사회문제와 연대해 거듭 확장해 나가야 한다. 김설(25) 광주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제1회 광주퀴어축제에 참가했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5월단체가 ‘신성한 5·18 광장에서 무슨 짓이냐?’고 항의한 것이다. 김씨는 “80년 5월 평등을 위해 싸웠던 광주에서 성소수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김형중 조선대 교수(국문과)는 “5·18은 기념관과 유적지와 묘지를 벗어나 거리로 도심으로 스며들어가야 하고 일상의 생활로 진입해야 한다. 난민·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소수자 운동과 적극 연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월 이후 세대’와 5월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기성세대와 달리 5·18에 별 부채감이 없는 20~30대에게 5·18은 점차 과거의 역사가 되고 있다. 이들은 5·18을 당위적으로 가르치려는 기성세대의 접근법에 거부감을 보인다.

문화기획자 박은현(29)씨가 스토리 펀딩 방식으로 만든 오르골 ‘광주의 오월’은 청년세대가 경쾌한 상상력으로 5·18을 재해석한 사례다. 옛 전남도청, 분수대, 택시, 윤상원 열사, 촛불의 힘 등 여섯 가지 5·18 상징 캐릭터를 뜯어 맞추면 내장된 태엽이 풀리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멜로디가 나온다. 박씨는 “무겁지 않게 5·18을 떠올리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파리 여행에서 만났던 오르골을 보고 광주와 접목시켰다”고 했다.

10일간의 5·18항쟁 마지막 새벽을 지켰던 시민군 박천만씨가 지난 12월11일 옛 전남도청을 찾은 전남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대하 기자
10일간의 5·18항쟁 마지막 새벽을 지켰던 시민군 박천만씨가 지난 12월11일 옛 전남도청을 찾은 전남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대하 기자

80년 5월 나눔의 주먹밥은 ‘오월 식탁’이라는 발랄한 콘텐츠로 진화했다. 문화기획자 그룹 장동콜렉티브는 ‘오월 식탁’이라는 온라인 콘텐츠를 구축했다. 김소진(25)씨는 “‘먹방’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밥 먹듯이 5·18을 기억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 영상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5·18을 겪은 할머니를 만나 요리법을 녹음한 뒤, 그 비법대로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이 음식을 나눠 먹으며 5·18에 대한 궁금증을 들었다. 이하영(25)씨는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친구들이 궁금해했던 5·18 이야기를 콘텐츠로 완성했다”고 했다.

국제연대도 40돌을 맞아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5·18단체와 광주 시민단체가 반송중(중국 송환 반대) 홍콩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경찰 폭력을 규탄하는 것은 이래서다. 5·18기념재단이 2000년부터 시상하는 광주인권상은 5·18의 국제연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인권 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 국가 시민단체와 교류도 지속하고 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는 “광주를 ‘과잉 신성화’하거나 유토피아화해서는 안 된다. 광주는 이제 조금은 가벼워져 누군가에게 넘치는 사랑을 전해 주는 도시가 돼야 한다”고 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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