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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겠다고 오른 배, 일본은 바다로 밀쳐냈다…강제동원 광부의 비극

등록 2023-09-12 09:00수정 2023-11-08 10:08

박철희 황산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유족회장
1944년 제주에 끌려간 광부 300여명
국내동원이라 위로금 지급대상서 빠져
“콘크리트 광물 창고, 교육공간 돼야”
옥선창 명반석 저장창고 내부. 전라도닷컴 제공
옥선창 명반석 저장창고 내부. 전라도닷컴 제공

음력 칠월 열엿새날 밤이면 마을 집집이 훤했다.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열일곱 가구나 됐다. 어렸을 적엔 “참 요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로 강제동원됐던 할아버지는 해몰 사고에서 살아났지만, 30대 후반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박철희(69·문내면 신흥마을) ‘황산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유족회장’은 지난 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구술채록을 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온 한 역사학자의 권유로 10여년 전부터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의 ‘진실 찾기’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사이에 있는 옥매산엔 명반석이 많이 묻혀 있었다. 명반석은 알루미늄 원광으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사용된다. 옥매광산에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채굴량이 늘었고, 1944년 조선총독부 지정 군수회사가 된 일본 아사다화학공업㈜은 노동자들을 강제동원했다. 해남군 문내·황산면에 살던 주민 500~1200여명이 일본 기업이 경영하는 옥매광산으로 강제동원됐다. 박 회장은 “옥매광산 노동자 등 전국의 많은 광부가 일본 본토 사수의 보루로 삼으려던 제주로 또다시 강제동원됐다”고 말했다.

박철희 황산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유족회장. 전라도닷컴 제공
박철희 황산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유족회장. 전라도닷컴 제공

옥매광산 광부 300여명은 1944년 3월 세 차례에 걸쳐 제주로 끌려갔다. 제주 모슬포 인근 지역과 구좌읍 해안 동굴, 산방산 등지의 군사시설물 구축 공사장에 투입돼 진지를 구축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소여물 같은 밥을 먹었으며, 속옷만 입은 채 막사도 없이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곳에서 생활”했다. 이듬해 해방이 되자 8월23일 새벽 1시께 250명(일본인 관리자 3명 포함)을 태운 35톤급 목선을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박 회장은 “광산과 광부 사이의 가교 구실을 했던 고 김백운씨(2022년 사망)가 ‘목선이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해 광부들이 배를 탈 때마다 숫자를 셌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 옥선창(옥동선착장) 바닷가에 세운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 전라도닷컴 제공
전남 해남 옥선창(옥동선착장) 바닷가에 세운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 전라도닷컴 제공

귀향선은 전남 완도 청산도 해상에서 기관고장이 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도 발생했다. 광부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렸다. 때마침 일본 경비함(군함)이 사고 해역으로 접근했다. 고 김백운씨와 일본인 관리자 1명만 먼저 구조됐다. 박 회장은 “군함에선 사고당한 이들이 조선인들이라는 말을 듣고선 산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 심지어 광부들이 배에 올라타니까 그들을 밀어버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의 할아버지(박검술)도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 발판을 잡고 있다가 밀물에 떠밀려 청산도 주민들한테 구조됐지만, 그때 폐가 상해 3년도 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옥매산 광산에서 삭도를 통해 싣고 온 명반석을 보관하던 바닷가 창고. 전라도닷컴 제공
옥매산 광산에서 삭도를 통해 싣고 온 명반석을 보관하던 바닷가 창고. 전라도닷컴 제공

귀향선을 탄 광부 118명이 사망했다. 이 중 75명만 명단이 확인됐다. 생존자 명단은 67명만 파악됐다. 제주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제주계’를 만들어 봄·가을에 날을 잡아 만남을 이어갔다. 정부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2007년 12월) 제정 때 일제에 의해 국외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에게만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국내 동원자들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2012년 정부 차원의 첫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지만, 아사다화학이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 강제동원 숫자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 회장은 “아사다화학의 후신인 일본 업체에 6~7년전께부터 광부 명단을 달라고 해도 묵묵부답”이라고 말했다.

추모비를 세운 이들은 군민들이었다. 2017년 1350여명의 군민이 1460만원을 모아 옥선창(옥동선착장) 바닷가에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를 건립했다. 박 회장은 “추모비를 세우기 전날 꿈을 꿨는데, 검정 옷을 입고 모자를 쓴 분이 추모비 조형물 자리에 서서 고맙다고 하더라. 그분들의 원한이 조금 풀렸기를 바랄 뿐이다. 군민들이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다”며 “옥매광산에 얽힌 비극을 기록으로 제대로 남겨야 후손들이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옥선창(옥동선착장) 바닷가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 명반석 임시 보관창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라도닷컴 제공
옥선창(옥동선착장) 바닷가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 명반석 임시 보관창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라도닷컴 제공

옥매광산의 건축물에 관한 보존·활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옥매산 중턱 광물창고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선정하는 2017년 ‘올해의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됐다. 옥동리 바닷가 높이 10m, 폭 30m가량인 콘크리트 구조물 등은 일제 수탈의 역사적 증거다. 해남군은 2019년 광물창고와 광산 등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아 역사교육의 공간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일부가 조선대법인 소유여서 여의치 않았다. 박 회장은 “일제강점기 아픔과 평화를 알리는 공간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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