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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고보 3·1 만세 이끈 ‘소녀결사대’를 아십니까

등록 2019-02-28 14:55수정 2019-03-12 11:04

제주출신 강평국·최정숙·고수선의 불꽃같은 삶
제주 신성여학교 졸업 후 경성여고보 사범과 진학
3·1만세 때 경성여고보생 시위 주도해 투옥
제주 신성여학교 시절의 고수선(왼쪽)이 강평국의 머리를 땋는 가운데 최정숙이 앉아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주 신성여학교 시절의 고수선(왼쪽)이 강평국의 머리를 땋는 가운데 최정숙이 앉아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주 출신 최정숙(1902~1977), 강평국(1900~1933), 고수선(1898~1989) 선생(이하 호칭 생략)은 1914년 3월 가톨릭계 제주 신성여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다.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간 이들은 같은 기숙사에 살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같은 반에서 생활한 친자매나 다름없는 관계다. 이들은 1919년 3·1만세시위 때 경성여고보의 학생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문맹퇴치와 여권신장,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선각자들이다.

■ 1919년 3·1시위, 서울의 세여자

1919년 3월1일 오후 서울 경운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반 학생 최정숙은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종로로 나갔다. 무교정(무교동)을 거쳐 대한문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자 그 대열에 함께 참여해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제 헌병에 체포됐다. 최정숙의 ‘신문조서’(1919년 6월26일)에는 “발이 아파 기숙사에 누워 있었다. 그날 오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기숙사에 있던 학생이 모두 뛰쳐나갔다. 최은희, 강평국 등과 상의한 적도 없고, 3월1일에야 알았다”며 우연히 시위에 참여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최정숙의 3·1만세운동 참여는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고수선
고수선
당시 일제 경찰의 경성여고보 시위관련자 동정 및 성행조사 결과를 보면, 2월27~28일께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최은희 등이 독립운동 소요를 상의했다고 돼 있다. 경성여고보의 학생과 직원들은 시위 주동자로 최정숙과 강평국, 최은희를 꼽았다고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최정숙과 관련해 “학생들을 이끌며 강평국, 최은희 등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모의하고 3월1일에는 경성여고보 부속 제동여자보통학교에 교수실습을 가기로 했으나 2월28일부터 발이 아프다며 기숙사에 누워있다가 1일 오후 2시께가 되자 자리를 차고 일어나 학생들을 이끌고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고, 발이 아프다고 누워있었던 것은 (만세운동) 준비를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인 2월28일 오후 5시 박희도(33인 중 1인·당시 기독교 중앙감리교 전도사)와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경성여고보 본과 졸업반 학생 최은희(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박희도의 부름을 받고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박희도의 집으로 갔다. 최은희는 회고록 <조국을 찾기까지>(탐구당, 1973)에서 “경성여고보는 박희도의 지도로 1917년부터 학생들의 비밀써클이 조직돼 항일투쟁을 벌여왔다”고 말했다. 이 ‘비밀써클’을 최정숙은 사범과 학생 79명으로 조직된 ‘소녀결사대’라고 했다.

강평국
강평국
최은희는 과자를 먹는다는 핑계로 7~8명의 학생이 모인 기숙사 식모 방에서 박희도가 준 독립선언서를 펼쳤다. 이날 밤 제주에서 유학온 두 남학생이 몰래 제주 출신 최정숙, 고수선, 강평국을 만나고 갔다. 기숙사에서 생활한 이들은 모두 사범과 졸업반이자, 소녀결사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고수선은 <제남신문>에 연재한 ‘내가 걸어온 길’(1978년 6월15일)에서 “나는 박규훈(제주 출신·당시 경성고보 2학년)씨와도 연락 하고 있었는데 학교측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몸이라 기숙사에서 외출할 때는 예배당에 간다고 했고, 그래도 곤란할 때는 같은 동기생이며 본도 출신으로 같이 기숙사에 있는 강평국씨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최정숙(앞줄 가운데)
최정숙(앞줄 가운데)
박규훈이 기숙사 소사 숙소의 창문에 지게를 세워두면 강평국은 지게를 타고 밖으로 내려가 연락을 취하고 독립운동 정보를 얻어와 공유하곤 했다. 3월1일 오후 1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연락이 다 됐었는데 갑자기 낮 12시에 만세를 부르게 되자 박규훈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숙사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이미 독립선언서를 쓴 유인물이 학교 운동장에 살포돼 있었다. 교직원들은 수업을 중단한 채 긴급회의를 열었고, 기숙사 대문은 자물쇠로 잠궜다. 학생들은 화장실 벽에 ’불의코 백년 살지 말고 의코 하루 살아라’는 문구를 써붙였다. 기숙사 밖에서는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들렸다.

몇몇 학생이 ’대문을 부수자!’고 소리쳤다. 고수선과 동료 학생 김일조가 도끼로 문을 부쉈다. 최정숙은 생전에 “죽을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이고 파고다공원에 갔다”고 회고했다. 부서진 대문을 밟고 나간 학생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동료 학생들과 파고다공원으로 가다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나오는 인파와 마주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3·1만세운동 당일 붙잡힌 최정숙은 닷새동안 경무총감부에서 고문을 받았다. 최은희는 회고록에서 “우리 학교 학생 32명이 잡혔는데 학교로 연락한 결과 교장이 명단을 조회하고 ‘최정숙과 최은희는 그쪽 처분대로 해달라’고 하는 전화가 걸려온 뒤 교무주임을 보내 30명의 학생만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5일 오후 검사에게 심문을 받은 최정숙은 유치장 안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최은희의 치마 주름이 많이 터졌다며 자기 치마를 벗어 바꿔 입고 나갔다. 그러나 최정숙은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고, 뒤이어 최은희도 같은 곳으로 이송됐다. 최정숙은 3월20일 풀려났다. 강평국은 당일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20년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최정숙(왼쪽)과 강평국(가운데)
1920년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최정숙(왼쪽)과 강평국(가운데)
3월5일 2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고수선과 몇몇 학생들은 당시 3·1만세운동 연락책을 맡은 유철경 경성여고보 선생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일편단심’을 뜻하는 수천여개의 빨간 머리띠를 만들어 경성고보 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줘 2차 만세시위에 사용하도록 했다.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5일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남대문 역으로 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때도 강평국은 동료 학생들과 붙잡혔다가 3월24일 풀려났다. 고수선도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손가락 고문을 당해 평생 손가락에 상처가 남았다. 최정숙은 “나는 사상범으로서 써클 대표로 올라 있기 때문에 면회가 금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은 고수선, 강평국씨 등이 나보다 더욱 수고했는데 내가 주동으로 몰린 것이다”고 말했다. 고수선은 훗날 남긴 3·1만세 시위와 관련해 이렇게 회고했다. “강평국과 나는 외부 연락을 했다. 박규훈씨가 창으로 상황 설명을 하고 우리는 끝까지 종로경찰서 앞까지 갔다. 서울역에 당도, 용산서 총을 쏘아대자 바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피신. 4인(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박규훈)이 약속키를 우리는 끝까지 계속 일할 것을 약속. 제동 유철경 선생댁에서 등사, 머리띠를 만들어 박규훈씨에게 전달, 최 선생은 종로로 가다 대중에 휩쓸렸다가 체포. 수고는 강 선생이 많이 했다.”

경성여고보 시절의 강평국(앞줄 왼쪽)
경성여고보 시절의 강평국(앞줄 왼쪽)
■ 졸업 후 각자의 길 걷다

1919년 3월25일은 경성여고보의 졸업식날이었지만, 강평국과 최정숙은 일본 국가를 부르며 참석할 수 없다며 바로 제주로 내려와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은 우편으로 받았다. 강평국은 같은 해 4~5월 대정면 대정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최정숙은 아픈 몸을 치료하며 요양하다 4월15일 경성지방검사국의 소환 통보를 받고 붙들려 올라가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고 결사대 주모자로 몰려 거의 매일 고문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보석으로 풀려난 뒤 제주로 귀향했다가 11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정숙과 강평국은 여성교육에 앞장서기로 하고 1921년 제주에 ’여수원’이라는 사숙을 세워 여성계몽운동에 나섰다. 고수선은 그 해 4월 충남 논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군자금을 모금해 일본과 상해를 옮겨다니는 활동을 하다 이듬해 1920년 4월 도쿄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간토대지진이 발발하자 1923년 9월 귀국한 뒤 이듬해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이들은 1925년 12월에는 제주 여성들의 권익을 찾기 위한 제주여자청년회를 결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최정숙(오른쪽)과 강평국
1920년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최정숙(오른쪽)과 강평국
강평국은 여성해방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강평국은 <동아일보>(1925. 6.1, 7.20)에 기고한 ‘여성해방의 잡감’이라는 글에서 “우리 여자는 노예였다. 천하의 노예는 감옥을 벗어나 장차 향할 길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여자를 노예로 취급하려는 자와는 힘이 없고 돈이 없지만 싸워야한다. 결혼 자유, 연애 자유, 사회에 대한 사교 자유 등 여자의 자주독립에 관한 문제는 공상적 이론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물질적 유물주의의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주장했다.

제주에서 학교 교사로 있던 강평국은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항일운동에 더 열성적이었다. 1927년 1월 유학생 50여명이 모여 발기한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장과 신간회 도쿄지회 부인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28년 1월에는 여성의 권익 옹호를 위한 근우회 도쿄지회를 창립해 핵심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강평국은 일본에서 활동하다 몸이 아파 학업을 포기하고 귀행해 1933년 11월 세상을 떴다.

최정숙은 여수원에서 여성들을 가르치다 치료차 서울로 올라갔다가 1925년 3월 목포의 소화학원 교사로 부임한 뒤 아이들을 가르쳤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개교하자 37살의 나이에 들어가 의사 면허증을 받고 1944년 10월 제주시에서 정화의원을 열었다. 해방 뒤 제주4·3 때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 최정숙은 1949년 설립된 신성여자중학교와 1953년 개교한 신성여자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교육활동에 전념하다가 196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감으로 활동했다. 1977년 2월 77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강평국이 외조카 등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강평국이 외조카 등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고수선은 1926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부터 4개월 남짓 개성에서 의사로 지내다가 귀향한 뒤 제주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했다. 제주여자청년회 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제주도 최초의 의사인 김태민과 결혼한 뒤 태평양전쟁 말기 충청도 강경으로 떠났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1년 귀향한 뒤 한글강습소와 보육원 운영 등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을 했다. ’세친구’ 가운데 맏언니였던 고수선은 가장 늦은 1989년 눈을 감았다.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최정숙의 수의를 입힌 고수선은 그의 추도사에서 “60여년 전 당신은 10세요, 내가 14세 때인 우리 신성학교 시절부터, 기미 3·1운동 당시 당신과 최은희씨, 그리고 강평국씨 등은 서울 진고개로 들어가 체포당하자 그날 강당에 모여 석방 운동을 하다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구타당했다”고 회고했다. 1981년 11월 황사평 묘역에 ‘아가다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울 때도 84살의 나이의 고수선이 참석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강평국을 기리기도 했다. 맏언니의 역할을 한 고수선은 1989년 8월 눈을 감았다.

고수선 선생이 최정숙 선생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고수선 선생이 최정숙 선생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 ‘독립의 불꽃, 다시 일어나라

이들 ‘세여자’ 가운데 최정숙과 고수선은 훗날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난 강평국은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이 나온 제주 신성학원 총동문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일 제주시 관덕정에서 ‘독립의 불꽃 다시 일어나라’는 주제로 이들 3인을 기린다.

1일 오전 이들의 묘역을 참배하고, 생가 탐방 프로그램으로 ’3인의 길을 따라 걷다’는 행사를 연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당시 제주도 최초의 근대여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서울의 경성여고보에 진학해 비밀결사조직의 핵심 구성원으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강평국은 지금 같으면 언더그룹의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이후 이들은 제주에서 여권 옹홍를 위한 활동을 하다 각자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오순덕 신성학원 총동문회 최정숙사업기념단장은 “지난해 10월 보훈처에 강평국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다. 이번 행사는 신성 여성 독립운동가 3인을 기리는 행사이지만, 강평국 선생에 대한 서훈 촉구 서명운동도 벌인다. 이분들의 정신을 후배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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