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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총탄에, 무장대 죽창에 망가진 몸…“왜 난 4·3 후유장애인 아닌가?”

등록 2019-01-17 05:00수정 2019-01-17 10:39

제주 4·3 기획, 동백에 묻다 ⑭
밭에 다녀오다 경찰 총에 맞은 북촌리 장윤수씨
두 번 신청했다가 탈락…“왜 떨어졌는지 몰라”
아기 때 무장대 죽창에 찔린 고내리 김정아씨
일본 살아 신청소식 모르다가 지난해에 신청
제주4·3실무위원회, 지난해 12월 34명 통과
4·3 중앙위원회 통과해야 후유장애인 인정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서 있는 오래된 팽나무. 바닷바람에 휜 팽나무는 4·3의 비극을 알고 있을까.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서 있는 오래된 팽나무. 바닷바람에 휜 팽나무는 4·3의 비극을 알고 있을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4·3 당시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을 희생자에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제주4·3을 경험한 제주도민 가운데 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해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는 ‘4·3 후유장애인’들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후유장애인 신청을 했다가 뚜렷한 이유 없이 탈락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후유장애인 접수 사실 자체를 몰라 신청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경찰에 총상 입은 북촌리 장윤수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1947년 8월13일 오전 11시께 조천면(지금의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 조팟(조밭)에서 검질(김)을 매던 장윤수(90·당시 18)씨는 물질하러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망사리와 테왁을 들고 북촌리 바다로 갈 생각이었다. 장씨가 거의 집에 다다랐을 때다. 이웃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장씨도 골갱이(호미)를 든 채 이들을 뒤따랐다. 조금 뒤 총성이 울렸고, 장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만 밭디 갔당 물때가 되난 물질허래 오당 경해수게. 집이 왕 밥 먹엉 가젠. 겐디 사람들이 나 앞으로 막 도르멍 나 신더레 일만 허지 말앙 이런디도 봐산덴. 게난 밭디강 오당 그래 돌아수게. 나가 호끔 뽀르주. 너븐숭이 강 맞을 때 꺼정은 무신거 헌디 그루후젠 모르쿠다.”(나 혼자 밭에 갔다가 물때가 돼 물질하러 오다가 그렇게 됐어요. 집에 와서 점심 먹고 바다로 가려고. 그런데 사람들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나한테 일만 하지 말고 이런 것도 봐야 한다고. 그래서 밭에 갔다 오다가 그쪽으로 달렸어요. 내가 조금 빨라요. 너븐숭이에 가서 (총을) 맞을 때까지는 아는데, 그 뒤에는 모르겠어요.)

장윤수씨가 제주4·3이 본격화하기 전인 1947년 8월 총상을 입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장윤수씨가 제주4·3이 본격화하기 전인 1947년 8월 총상을 입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북촌국민학교 5학년이던 남동생 장윤승(87·당시 15)씨는 이날의 상황에 대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청년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 돌담에 삐라를 붙이고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인근 함덕지서 경찰들이 와서 마을청년들이 보이면 ‘누가 붙였느냐’며 잡도리하는 과정에서 청년들과 경찰 간에 마찰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궂은일을 하는 사람이 사이렌을 불면서 ‘경찰이 와서 북촌 사람들을 구타하고 있다. 빨리 나오라’고 했는데, 그때 누님이 달려가다 총을 맞았다. 아버지 친구분과 여자 등 모두 3명이 총을 맞았다”고 말했다. ‘삐라’와 관계없는 장씨가 총에 맞은 것이다. 당시의 신문에도 이날의 총상 사실이 보도됐다.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경찰이 쏜 총알은 장씨의 오른쪽 쇄골 밑을 관통했다. 가슴에 피가 흥건했고, 이웃들은 모두가 죽는다고 했다. 딸의 총상 소식을 들은 아버지(장기룡·당시 55)와 남동생, 그리고 총에 맞은 장씨를 포함한 3명은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타고 제주읍내 도립의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딸의 총상에 흥분해 함덕지서에 차를 멈추게 한 뒤 “우리 딸이 총에 맞아 죽게 됐다. 딸을 살려내라”며 기물을 부수고 지서 초가의 밧줄을 끊어버렸다. 경찰은 사과나 보상은커녕 기물을 파손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재판에 넘겼다. 아버지는 같은 해 9월26일 재판을 받아 소요죄 등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장윤수씨가 총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47년 8월의 <제주신보>(왼쪽)와 <중앙신문> 기사.
장윤수씨가 총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47년 8월의 <제주신보>(왼쪽)와 <중앙신문> 기사.
의사는 아버지에게 “왼쪽에 총을 맞았으면 죽었는데 오른쪽에 맞아서 살았다”고 했다. 총상을 입었던 주민 2명은 장씨보다 일찍 퇴원했지만 사경을 헤매던 장씨는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장씨는 퇴원 뒤에도 한동안 누워 지냈다. 장씨는 “젊을 때 물에 들 때는 상처가 아물어 아프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씨가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리키며 쇄골 아래를 누르자 쑥 하고 들어갔다.

장씨는 “추워지면 오른팔에 힘이 없어 쓸 수 없게 된다. 총에 맞았던 부위는 물에 들어가면 얼어버린다. 춥거나 바람이라도 불려 하면 며칠 동안은 꼼짝하지 못하고 몸살이 난다”고 말했다.

장씨는 총상을 입은 상처와 주민들의 증언이 있는데도 지난 2004년과 2014년 두 차례나 제주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장씨는 “왜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윤수씨가 총상을 입고 생긴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장윤수씨가 총상을 입고 생긴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병원에 가니까 총알이 들어가고 나온 거 다 봤으면서도 상처가 없다고 말해. 그런 일이 어디 있어? 총 맞은 것을 알면서도 상처가 없다고 하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유증이 점점 심해지는 같아.”

장씨는 지난해 말 제주도에 다시 4·3후유장애인 신청을 해 제주4·3실무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했다. 남동생 장윤승씨는 “처음에 후유장애인 신고를 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했다. 진짜 총 맞고 평생 아픈 누님이 인정받지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아버지’를 부르고 싶었다…무장대에 당한 고내리 김정아

“살아오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해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지난 13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정아(74·일본 도쿄 아라카와구 닛포리)씨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북제주군 애월면(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가 고향인 김씨가 일본에 건너간 지는 40여년 가까이 된다. 닛포리는 제주도에서 학살이 자행되던 1949년 5월29일 고내리 청년단 주최로 4·3추도회가 열린 곳이다.

김정아(일본 도쿄)씨가 지난해 10월 제주4·3평화재단을 찾아 4·3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 제공
김정아(일본 도쿄)씨가 지난해 10월 제주4·3평화재단을 찾아 4·3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 제공
김씨는 그날의 상황을 할머니(강신행)로부터 들으면서 자랐다. 1948년 11월13일 밤, 아버지(김봉원·당시 24)는 마을 공회당에서 ‘그 사람들’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면서 ‘그 사람들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했다. 김씨는 ‘폭도’라는 표현 대신 ‘그 사람들’이라고 했다. “회의가 끝나고 집에서 잠을 자는데 회의를 엿보던 ‘그 사람들’이 이튿날 새벽 2시께 집에 들어와 아버지와 어머니, 갓난아기였던 나까지 그들이 휘두르는 칼과 죽창에 당했어요.”

제주4·3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국가공권력에 희생됐지만, 무장대에 살해된 민간인도 있었다. 무장대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거나 토벌대 쪽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잔인성을 보이기도 했다.

부모의 죽음 속 아기는 만신창이 된 채 살아남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오창순·당시 23)는 어린 자식을 혼자 남겨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는지 어디 하나 성한 데 없이 고통 속에 열흘쯤 버티다 끝내 숨을 거뒀어요. 내가 죽고 어머니가 살 줄 알았는데 그 반대가 됐어요.“ 무장대는 두 돌이 갓 지난 김씨에게도 죽창을 휘둘러 팔과 가슴, 귀를 크게 다쳤다.

1948년 7월 졸업식을 가진 애월공립초급중학교(현 애월중학교) 제1회 졸업생과 교사들. 김씨의 아버지(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는 졸업식 4개월 뒤 희생됐다.
1948년 7월 졸업식을 가진 애월공립초급중학교(현 애월중학교) 제1회 졸업생과 교사들. 김씨의 아버지(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는 졸업식 4개월 뒤 희생됐다.
일제 강점기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애월중학원 설립에 뛰어들어 숨지기 전까지 수학을 가르쳤다. 김씨는 “아버지가 학교 설립 뒤 주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라고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며 고향에 눌러앉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들의 무덤가에 가서 우는 날이 많았어요. 자주 아들의 무덤을 찾았어요. 아들의 무덤 앞에서 말도 못한 채 목놓아 통곡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30년 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김씨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운동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손녀가 가여웠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이 떠올라 갈 수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남은 자식이라도 살려보겠다며 숙부와 고모를 밀항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냈다.

귀에서 진물이 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다

김씨의 기억 속에는 4·3이 없지만, 몸에는 4·3이 고스란히 70여년의 세월 동안 남아있다. 갓난아기 때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할머니는 아들의 유일한 핏줄인 나를 살리기 위해 정성으로 치료했어요. 시간이 갈수록 가슴과 어깨, 팔의 상처는 아물어갔지만, 귀는 나아지지 않았어요.”

김씨의 몸 곳곳에는 당시의 상처가 남아있다. 김씨는 “여름에 반소매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팔을 쳐다보며 ‘왜 이렇게 됐느냐’고 물어본다. 어릴 때 다쳐 많이 아물기도 했고, 성형수술도 했지만 여전히 흉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오른쪽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귀에서 진물이 흘렀다. 김씨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에서 진물이 흘러 옆에 사람이 있으면 부끄럽고 창피해 손수건으로 막고 다니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결혼 뒤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수술했다. 의사가 청력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간절함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찾아간 도쿄대학병원에서 김씨는 치료받아도 고치지 못한다는 말만 들었다.

김정아씨가 지난해 10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 제공
김정아씨가 지난해 10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 제공
김씨는 지난해 10월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4·3평화공원이 만들어지고, 4·3희생자·유족 신고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김씨는 제주4·3평화재단의 도움으로 4·3후유장애인 신청서를 접수했다.

“딸들에게도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 말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4·3의 상처를 말해줬지요. 4·3은 여전히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고통입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눈물로 젖었다.

후유장애인 결정은…4·3중앙위 개최 미정

제주4·3후유장애인으로 결정되면 지방비에서 생활보조비(월 70만원)와 의료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4·3후유장애인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까다롭다. 후유장애인 생존자는 현재 75명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후유장애인 결정이 이뤄졌던 지난 2014년 5월에는 33명이 신청해 7명만 인정됐고, 나머지 26명은 불인정 됐다.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실 입증확인서와 진단서를 첨부해 신청하고, 제주4·3실무위원회와 총리실 산하 제주4·3중앙위원회 심사에서 통과해야 한다. 지난해 말 제주4·3실무위원회 심사에서 통과한 후유장애인 신청자는 34명이다. 현재 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제주4·3중앙위원회가 언제 열릴지 정해지지 않았다. 신청자들은 대부분 80살 이상의 고령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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