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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학생들은 왜 ‘양과자 반대운동’을 벌였나

등록 2018-10-08 14:19수정 2018-10-08 15:16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②
해방공간 제주 학생들이 전개한 양과자 반대운동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양과자 대신 식량을 달라”
친척 집에 20일 숨었다가 어머니 강권에 일본으로
“4·3 완전한 해결은 희생자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
“해방 당시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굶주렸나. 제주도에 먹을 양식이 없었어. 미군정이 식량을 줘야 살아갈 텐데 양과자를 주는 거야. 그래서 초코레토(초콜릿)를 막고 양식을 배급하라고 호소한 거지.”

미군정기인 1947년 초 제주도 내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운동은 식량문제와 결부되면서 도민들의 호응 속에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양과자 반대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현정선(91·일본 도쿄·제주 함덕리 출신)씨가 양과자 반대운동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20살의 제주농업중학교(농업학교) 3학년(6년제) 학생이었다.

지난 1월 일본 도쿄에서 만난 현씨는 “일제시대 때 농업학교 학생들은 농촌에 공출 감시요원으로 나가 부모 형제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곡식을 공출하는 것을 지켜봤다. 식량을 빼앗긴 도민들은 굶주렸다. 그런 경험 때문에 해방 뒤 식량이 아니라 미국의 양과자가 들어오자 반대운동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도라꾸(트럭)에 학생 대표 10여명이 탔어. 제주중, 오현중 대표도 있었고, 나는 농업학교 대표로 참가했지. 마을마다 차를 세우고 종이로 만든 마이크를 손에 잡고 연설했어.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양과자를 먹지 말자’, ‘먹을 것을 달라’고 했어.” 망백의 나이에도 현씨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1947년 초의 제주에서 일어난 양과자 반대운동에 대해 말하는 현정선씨.
1947년 초의 제주에서 일어난 양과자 반대운동에 대해 말하는 현정선씨.
양과자 문제는 전국적으로 좌·우익 가릴 것 없이 심각한 국내의 경제·사회문제로 인식됐다. 좌·우익 단체들도 1947년 1월 일제히 성명을 내고 ‘양과자를 먹지 말자. 신개화와 함께 들어온 눈깔사탕을 먹다 망해버린 경험을 상기하자’, ‘미국은 조선을 상품 시장화하려고 한다. 양과자는 달콤한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번영과 독립에는 관계가 없다’며 양과자 수입을 반대했다.

학생들로 이뤄진 제주도 내 중등학교연맹은 1947년 2월10일 제주 미군정청이 있는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구호를 내걸고 양과자 수입 반대 시위를 벌였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350여명의 학생이 미군정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이를 강제 해산해 시내 밖으로 내쫓았다”고 기록돼 있다. 현씨는 “미군정청 앞에서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 섰다. 미군이 지프에 기관총을 설치해서 위협했다. 기관총을 쏠까 봐 더는 나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양과자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6년 하반기에는 제주농업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교육’과 ‘파쇼 교육’에 반대하며 동맹휴업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관련해 현씨는 “1년 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제 때의 나쁜 관습이 그대로 이어져 후배들을 많이 때렸다. 그래서 제주시 사라봉에 모여 이른바 ‘사라봉 회의’를 열고 동맹휴업에 들어간 것이다”고 말했다.

<제주신보> 1947년 2월10일치에 보도된 제주지역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 시위 기사.
<제주신보> 1947년 2월10일치에 보도된 제주지역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 시위 기사.
해방을 맞은 현씨와 그의 동료들에게 미군은 ‘해방군’이었다. 미군이 처음으로 제주도에 상륙한 것은 해방된 지 44일만인 1945년 9월28일이었다. 이날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제주도 주둔 일본군 제58군사령부와의 항복조인식에 참가차 미군 제24군단 항복접수팀이 제주에 왔다. 현씨와 동료 학생들은 “해방군이 온다며 성조기를 만들어 환영하러 나갔지만 미군들이 다른 길로 지나가 버렸다”고 떠올렸다.

현씨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다. 우리를 해방해준다고 했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지 않은가’는 생각이 들면서 차차 대립하게 됐다”고 했다. 현씨는 양과자 반대운동 때 ‘삐라’(전단)를 붙이다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구쟁기 작살고문’(잘게 부순 소라껍데기 위에 꿇려 앉혀 무릎을 밟는 고문) 등을 받고 구금되기도 했다. 이어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한 항의로 전개된 3·10 총파업 관련 전단을 불이다 국방경비대원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쳤다.

현씨가 조천의 친척 집 마루방 밑에 숨어 지낸지 20일째 되던 날 밤, 함덕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 “내 뒤를 따라와라. 여기 있으면 죽는다. 일본에 형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밥은 먹을 수 있다.” 어머니 뒤를 따라 한밤중 길을 나선 현씨는 함덕리의 포구에서 밀항선을 탔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밀항해 오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4·3의 참상을 전해들었다. 현씨의 형과 조카도 4·3 때 희생됐다.

주한미군사령부 주간정보보고서(1947. 2.16)에는 학생들이 미군정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여 강제 해산한 뒤 시내 밖으로 내쫓았다고 기록돼 있다.
주한미군사령부 주간정보보고서(1947. 2.16)에는 학생들이 미군정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여 강제 해산한 뒤 시내 밖으로 내쫓았다고 기록돼 있다.
형이 사는 오사카에서 2년 남짓 머무르던 현씨는 도쿄로 가 일본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플라스틱 제조업체를 운영했다. “운명이란 게 이상해. 선배 한 분이 도쿄에서 양과자 장사를 하고 있었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주인까지 됐거든.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프라이드(자존심)가 있다’고 하던 내가 양과자로 먹고 산 거지. 허허.”

한밤 중 몰래 밀항선을 탔던 현씨가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은 54년만인 2001년이었다. 4·3항쟁 60주년 행사가 열린 2008년에도 제주를 찾아 제주 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를 둘러봤다.

“위패봉안소에 가보니 어떤 이는 희생자로 인정해 위패를 모시고, 어떤 이는 모시지 않았어. 4·3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자면서 희생자에 차별을 둬서는 안돼. 모두 희생자로 올려야 해.” 현씨의 소원은 이뤄질까.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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