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주년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 제1관에 누워 있는 ‘백비’를 추모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 백비 앞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평화기념관. 어두침침한 제1관 ‘역사의 동굴’에 들어서면 새소리가 잠깐 들리고 양옆에는 깨진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과 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천장에서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듯이 들리는 물소리는 어두운 동굴 안에 있는 느낌을 준다. 4·3 당시 제주도에 널려 있는 자연동굴들은 제주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그 동굴의 끝 지점에 하얀 대리석 비석이 누워 있다. 비석은 천장의 원통형 기둥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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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지 못한 역사 비석의 표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이른바 ‘백비’다. 설명문에는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없어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백비는 사건 발생 70년이 되도록 이름 짓지 못한 4·3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2003년 10월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정부 보고서)가 확정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고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지만, 여전히 4·3은 ‘이름 짓지 못한 역사’로 남아 있다. 당시 정부 보고서는 사건의 정의는 내렸지만, 성격 규정은 미뤘다. 2003년 10월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제주4·3위원회)가 확정한 정부 보고서 서문에서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보고서는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대사의 큰일 가운데 4·19 혁명은 이미 법·제도적 공인이 이뤄졌고, 부마(부산마산)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은 문재인 대통령이 마련한 개헌안 전문에 명시될 정도로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받았다. 이와 달리 ‘제주4·3’은 그냥 ‘4·3’이다. 발단부터 마무리까지 한달 안팎이었던 다른 사안과 견줘 4·3은 7년7개월이 걸려 성격 규정이 어려워졌다. 분단과 냉전 초기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제주4·3은 미군의 직간접적인 개입과 진압에 나선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의 반인륜적인 잔학 행위 등이 얽히고설켜 확대됐다.
제주에 여행을 왔다가 지난 3월10일 제주4·3기념관을 들른 송한용 전남대 5·18연구소장은 “처음에는 4·3 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기 때문에 누가 희생자인지 몰라 백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주 사람들의 딜레마를 백비를 통해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백비로 상징된 것 같다. ‘국가폭력’에 대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마음, ‘항쟁’이나 ‘학살’이라는 표현은 국가권력이나 우익이 싫어해서 쓰지 못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제주4·3 희생자 유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위패봉안실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찾고 있다.
학살·희생 프레임 갇힌 4·3…‘역사의 눈’으로 이름짓자
국가는 50년간 “폭동”이라 했고
진보사학계는 “항쟁”이라 했다
최근 15년간 학살 규명에 초점
‘통일국가 향한 투쟁’ 담론 상실
항쟁성 등 역사적 대의 재조명
다양한 성격 포괄한 ‘정명’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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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이란 여야 합의로 2000년 1월 제정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사건’의 정의를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 보고서를 보면, 제주4·3은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3·1절 28주년 기념대회’ 참가자들의 거리행진을 구경하던 초등학생과 젊은 부녀자를 포함해 6명이 숨졌는데도 경찰이 발포 책임자 처벌은커녕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면서 시작됐다. 그 뒤 1948년 3월까지 2500여명이 검거돼 고문을 받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또 극우 도지사 유해진의 독단적 행정행위, 극우세력인 서북청년단의 제주도민에 대한 가혹 행위와 1948년 3월 경찰에 의한 2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1948년 4월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5·10 단독선거 반대 등을 명분으로 무장봉기에 나섰다. 4·3은 미군정 아래서 일어나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통제구역이 해제될 때까지 7년7개월에 걸쳐 전개됐다.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 희생자 위패에 유가족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제주4·3 희생자 유족이 제주4·3평화공원 안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각명비 앞에 앉아 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남로당의 무장봉기와 ‘5·10 선거 반대’ 등을 들어 4·3을 여전히 ‘공산폭동’이자 ‘반란’이라고 본다.
그러나 제주 4·3 시기 무장대의 민간인 학살과 방화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단학살과 무차별적 방화는 군·경 등이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제주4·3위원회가 희생자와 유족을 마지막으로 심사한 지난해 7월25일 현재 희생자 1만4232명(사망 1만244명, 행방불명 3576명, 후유장애 164명, 수형인 248명), 유족은 5만9426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는 5.4%(772명), 11~20살은 17.3%(2464명)로, 전체의 22.7%가 20살 이하다. 61살 이상은 6.3%(900명)를 차지했다. 이런 희생자 비율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희생됐음을 보여준다. 정부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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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명운동이 전개되나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4·3범국민위)는 올해 70주년을 맞아 ‘4·3에 정의를, 역사에 정명을’이란 구호를 내걸었다.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가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했다는 말에서 정명이 나왔다. 박찬식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은 “정명 문제가 공식적인 역사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회적 토론과 합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계속 덮어놓고 갈 수는 없다. 70주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식 정명이 이뤄지긴 어렵더라도 4·3의 주체적인 측면들을 조명하고 평가하는 부분은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4·3이 특별법 제정 등으로 제도화되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 대량학살 등의 프레임에 갇힌 측면이 있다. 당시 도민들은 단순히 희생과 억압의 객체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였다. 해방공간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해가는 주체로서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려는 노력과 투쟁이 있었는데 (정부 보고서 이후) 지난 15년 동안의 담론 속에서 실종된 측면이 있었다”며 정명운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제주4·3 때인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 때 해안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주변에 피신해 있던 주민 50여명이 희생된 제주도 서귀포시 영남마을 전경. 한라산 남쪽 첫마을이라는 영남마을은 그 뒤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4·3은 그동안 폭동과 항쟁, 학살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폭동’은 사건 이후 50여년 가까이 국가의 공인된 인식이었고, 지금도 일부 보수세력들은 4·3의 성격을 ‘폭동’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토벌은 정당했고, 진압 과정에서 일부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시각이다. 진보 역사학계 등은 외세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분단에 반대한 ‘항쟁’으로 규정한다. 또다른 시각은 4·3의 진실을 규명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4·3의 발생 원인을 분석하고, 외부의 부정과 불의 등 부당한 탄압에 맞서 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정의’로운 투쟁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연구자들은 제주4·3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돼 정명에 대한 합의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정명 문제에 관한 한 현장과 연구자들 간에 괴리가 있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4·3은 ‘항쟁’이다. 해방공간에서 1948년 상황까지를 보면 항쟁이다. 그러나 그 뒤 1954년까지의 기간은 항쟁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죽임과 죽음의 싸움이었다”며 “그래서 정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백비는 여운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전체 희생자의 10% 미만으로 보이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유족들의 마음도 같이 헤아려야 한다. 비율이 아주 적다고 하더라도 무장대의 과오도 분명히 있다. 동학처럼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4·3을 개인사나 가족사가 아닌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정명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항쟁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자인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개인 의견과 공적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정명운동은 4·3 70주년을 맞아 내건 슬로건으로, 분명히 적극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정명운동으로 국민적 추인을 받는 건 매우 어려운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동학운동도 처음에 동학란에서 시작해 동학혁명을 거쳐 동학농민전쟁으로 정설화됐는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정명화됐다”고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4·3의 ‘항쟁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4·3사건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는 4·3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4·3의 항쟁적인 면을 부각하기 어려웠고, 그냥 4·3특별법에 있는 대로 하자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온 측면이 있다. 정명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4·3의 발발 원인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 보고서에도 있지만, 특히 3·1절 기념대회 이후 제주도에 몰아닥친 육지 사람들의 횡포나 미군정의 실정, 해방된 지 2~3년이 지났지만 통일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암담함, 이런 것들이 결국은 4·3으로 폭발한 것이다. 서북청년단 등에게 당했다는 강한 피해의식 등도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항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또 4·3은 다른 사건과 달리 매우 오래 지속됐다. 항쟁적인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한 단계 더 (연구가)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4·3항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양정심 박사는 “4·3이 현재진행형이듯이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가 만나기 위해서라도 4·3의 다양한 성격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3은 추모공원, 추념일, 유적지, 유해 발굴 등 아픔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대중의 자주적 국가 수립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 녹아든 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 앞에서 한 유족이 절을 올리고 있다.
박찬식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은 그 부분대로 충분히 조명돼야 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정명 문제와 연결해야 맞는지는 고민이다. 무장대로 나서던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제주도민, 다수 국민의 열망이 기저에 있다. 항쟁으로서 정당성이 있었다고 해도 무장대가 살해한 피해자 유족들 처지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대의를 가지고 싸웠던 부분을 덮어버리고 희생의 프레임만 4·3의 모든 것이 돼 버리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4·3이 원래 시작됐던 배경과 동기, 주체로서의 역사,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조명을 늦출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제주4·3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바라보는 견해가 달라서 모두가 합의하는 명칭을 부여하기는 아직 쉽지 않은 것 같다. 4·3 발발의 사전과 사후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논의가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혀간 뒤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당분간 불완전하지만 ‘4·3’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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