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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잊지 말라”…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의 100살 잔치

등록 2017-01-15 17:05수정 2017-01-15 22:33

경남 통영·거제 시민모임, 백수잔치 열어
학생들 춤·노래 ‘재롱잔치’에 살며시 웃음
노환에 가쁜 숨 “도움 너무 감사합니다”

1939년 공장 취업에 속아 중국으로 끌려가
피해 증언·시위…평생 모은 전 재산 기부
“죽기 전 일본으로부터 사죄받고 싶어…
다음 생에는 족두리 쓰고 시집가고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경남 통영시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살 생신 축하연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를 신고한 여성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김 할머니를 비롯해 40명에 불과하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경남 통영시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살 생신 축하연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를 신고한 여성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김 할머니를 비롯해 40명에 불과하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김복득 할머니의 100살 생신잔치가 끝날 무렵, 잔치를 준비한 송도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통영·거제 시민모임’ 대표가 “잔치에 온 축하객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라고 부탁하자, 김 할머니는 환자용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한모금 한모금 몰아 쉬며 힘겹게 대답했다.

송 대표가 이번엔 “올해 소원은 무엇이에요”라고 물었다. 김 할머니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르륵, 눈물이 두 뺨의 깊은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한국 정부에 신고한 할머니 239명 가운데 15일 현재 199명이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이미 눈을 감았고, 생존자는 40명에 불과하다. 생존자 중 정복수(102) 할머니에 이어 두번째 고령자인 김복득 할머니는 1918년 1월14일(음력 12월17일)생으로, 지난 14일 우리 나이로 100살이 됐다.

이날 김 할머니의 100살 생신잔치가 경남 통영시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강당에서 열렸다. 김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2013년 11월6일부터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세 생신 축하연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끈 뒤 박수를 받고 있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세 생신 축하연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끈 뒤 박수를 받고 있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내가 죽기 전 일본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죄를 받는다면 소원이 없겠소. 그래도 남은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는 족두리 쓰고 시집가서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소.”

김 할머니는 몇 년 전까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까운 몇몇 사람들만 겨우 알아보고 조금씩 대화할 뿐이다. 백수연 행사장에서도 말은 거의 하지 않고, 표정이나 고갯짓으로 마음을 살포시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영고·통영여고 학생들이 사물놀이, 춤, 노래 등으로 할머니 앞에서 ‘재롱잔치’를 해도 살며시 웃거나 때때로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애창곡 ‘섬마을 선생님’이 울려 퍼져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 할머니의 조카손녀 김은애(25)씨는 “생신 잔치에 가기 위해 아침에 화장을 하셨는데, 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할머니 예뻐요’라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환하게 웃으셨어요”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간병인은 “오늘 아침엔 물메기탕을 드셨어요. 음식은 전복죽이고 통닭이고 피자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드시는데, 요즘은 크로켓 빵을 특히 즐겨 드셔요”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검은 옷 입은 사람을 무서워하며, 가끔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송도자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 악몽이 되살아나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교복 입은 학생들이 단체로 병문안을 오면 다음엔 밝은색 옷을 입고 와달라고 부탁한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한 이후,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007년 일본 나고야와 2011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증언집회에 참여해 자신이 겪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경험을 증언했고, 2010년 일본 중의원회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또 2012년 통영여고 장학금, 2013년 경남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2000만원씩 기부했다. 평생 모은 전재산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세 생신 축하연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시민들의 다양한 축하 공연을 지켜보다 눈물을 닦고 있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14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열린 100세 생신 축하연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시민들의 다양한 축하 공연을 지켜보다 눈물을 닦고 있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김 할머니의 뜻을 기려 경남도교육청은 2013년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나를 잊지 마세요>를 펴내, 도내 모든 초중고등학교에서 역사교재로 사용하도록 했다. 경남도교육청은 이 책의 일본어판과 영문판도 펴내, 일본과 미국에도 보냈다. 같은 해 통영 남망산공원엔 김 할머니를 상징하는 소녀상 ‘정의비’가 세워졌다.

송도자 대표는 “김복득 어머니는 그 존재만으로 인권과 여성 존엄의 상징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문제를 사실상 10억엔에 팔아넘기는 말도 되지 않는 내용으로 일본 정부와 합의한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원통해 하겠냐”며 안타까워했다.

김 할머니는 경남 통영 출신으로, 22살 때이던 1939년 거제 장승포에 있는 고모집에 가려고 부두에 나갔다가, 공장에 취업시켜 주겠다는 징용모집자의 말에 속아 부산으로 갔다. 1남2녀 중 장녀인 그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의 조카 김창욱씨는 “예전에 고모는 일제강점기에 겪었던 일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고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하기 전까지 일본에 징용을 갔다 오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김 할머니를 태운 배가 도착한 곳은 중국 다롄이었다. 결국 그는 일본군 이동에 따라 중국에서 필리핀까지 끌려다니며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다, 1945년 해방 직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통영/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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