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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아는 체도 안 해”…송전탑 건설에 무너진 밀양 공동체

등록 2016-12-29 13:43수정 2016-12-29 21:46

[르포] 반대 투쟁 주민들 “주민 갈등이 투쟁보다 힘들다”
한전 보상금에 서로 갈라져…“이웃조차 믿을 수 없게 돼”
마을공동체 파괴 원인 찾기 위해 진상조사단도 꾸릴 예정
경남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주민들이 지난 28일 마을 진입로 인근 129번 송전탑 앞에 모여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주민들이 지난 28일 마을 진입로 인근 129번 송전탑 앞에 모여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찬성·반대 주민끼리는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아요.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하는 집도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이웃조차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죠. 한전과 싸우던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 때보다 주민들끼리 싸우는 지금이 훨씬 괴롭습니다.”

자신의 삶터에 초고압 송전탑이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10년 넘게 피눈물을 흘린 경남 ‘밀양 할매들’이 최근 마을공동체 파괴라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싸울 때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위해 이 고통을 견디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을씨년스런 찬바람이 휘날린 지난 28일. <한겨레> 기자와 만난 이남우(73) 평밭마을 송전탑 반대 주민 대표는 “찬반 주민들 간 갈등에 따른 피해가 송전선로에서 발생하는 전자파 피해보다 심각하다. 싫으나 좋으나 서로 얼굴을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한 해를 넘기는 연말이 돼도 주민들끼리 모여 덕담 한마디 나누지 않는 이게 무슨 마을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화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평밭마을은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의 중심에 섰던 마을 중 한 곳이다. 마을을 사이에 두고 129번 송전탑과 130번 송전탑이 세워져 있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 10여명은 이날 낮 마을 어귀 사랑방에 모여 과일과 김밥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벌였던 밀양 평밭마을 주민들은 마을 어귀에 사랑방을 마련해 서로를 위로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벌였던 밀양 평밭마을 주민들은 마을 어귀에 사랑방을 마련해 서로를 위로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김길곤(85) 평밭마을 자치회장은 “생명과 우리라는 가치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인데, 정부와 한전은 돈으로 주민들을 갈가리 찢어놓고 짓밟았다. 하루라도 빨리 새 대통령과 정부가 들어서서 모든 잘못을 바로잡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순희(79)씨도 “정부 정책에 찬성하지 않는 주민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은 잘못됐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국민을 죽이는 나라가 무슨 나라냐”며 정부를 비판했다.

평밭마을 주민 가운데 송전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구화자(75)씨는 “날씨가 궂은 날이면 송전탑과 송전선로에서 나는 ‘삐삐’ ‘쿵쿵’ ‘피웅피웅’ 등등 온갖 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또 밤마다 송전탑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멀쩡하던 사람도 미쳐버릴 것 같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이금자(85)씨는 “한전은 ‘송전탑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우리가 매일 보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보다 적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돈으로 주민들 입을 막아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라지만 그래도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줄은 안다. 선량한 국민을 속이고 벌인 일이 언제까지고 숨겨질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라고 말했다.

한옥순(69)씨는 “살기 좋던 우리 마을을 한전이 돈으로 버려놓았다. 수천명 경찰이 몰려와도 버티던 주민들이 돈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매일 송전탑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송전탑에 올라가 뛰어내려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사례(88)씨는 “예전엔 데모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빨갱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데모를 해보고 나서야,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데모를 하는지 알게 됐다. 지금이라도 철탑만 뽑아낸다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겠다”고 말했다.

밀양 평밭마을 주민 구화자씨가 자신의 집 근처에 세워진 129번 송전탑과 송전선로 때문에 겪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밀양 평밭마을 주민 구화자씨가 자신의 집 근처에 세워진 129번 송전탑과 송전선로 때문에 겪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전력은 울산 울주군 신고리원전 3·4호기에서 생산할 전기를 전국에 공급하기 위해 원전에서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까지 울산 울주군, 부산 기장군, 경남 양산·밀양시와 창녕군 등 5개 시·군 90.5㎞ 구간에 밀양 69개 등 송전탑 161개를 세우고 송전선로를 설치하는 ‘765㎸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2008년 8월 착공했다. 원자력발전소 확대 에너지 정책을 펴는 우리 정부의 국책사업이었다.

하지만 ‘전기 고속도로’라고 불릴 만큼 초고압 송전선로가 마을과 논·밭·축사 인근을 통과할 것을 알게 된 밀양주민들은 2005년 12월부터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과 위양마을, 상동면 고답마을, 단장면 용회마을 등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움막을 짓고 번갈아 기거하며 밤낮으로 감시했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송전선 노선을 바꾸거나, 전압을 낮춰 지하에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또 전문가들을 동원해 스스로 대안을 찾는 노력도 했다.

하지만 한전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현실성이 없다며 주민 요구를 거부하고, 보상만을 강조했다. 돈으로 설득되지 않는 주민에겐 국책사업이라며 공권력을 동원했다. 한전은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에 소극적이던 주민들부터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밀양지역 보상 대상은 단장·산외·상동·부북·청도 등 5개면 30개 마을 2206가구였다. 정부와 한전은 ‘송·변전설비 주변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송주법) 등 보상 관련 법률과 한전 내규까지 바꿔, 마을발전기금이라는 이름의 마을별 공동보상금 가운데 40%를 가구별 개별지원금으로 전환했다. 지금껏 진행된 국책사업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보상 방식이다.

가구별 개별지원금을 받으려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지 않으며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개별지원금은 오손도손 살아가던 마을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놨다. 송주법에 따라 765㎸ 송전탑에서 반지름 1㎞ 안에 사는 주민은 전기·휴대전화 사용료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한전은 지원을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에게는 이를 지원하지 않고 있다. 송전탑 건설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서는 주민이 늘어나면서 마을발전기금까지 가구별로 나눠 가지는 마을도 생겼다.

결국 한전은 2014년 말 공사를 완료하고, 시험운전을 거쳐 지난해 6월부터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송전선로로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난 11년 동안 주민 2명이 목숨을 끊고, 383명이 입건됐다.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밀양을 찾은 시민사회단체 회원 중에도 69명이 입건됐다. 23명은 아직도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 말한다.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에 의해 농성장이 모두 강제철거되자, 주민들은 마을별로 사랑방을 만들었다. 현재 부북면 평밭마을과 위양마을, 상동면 고정마을, 단장면 용회마을과 동화전마을 등 5개 마을이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평소에도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투쟁을 이어간다.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위양마을의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지난 28일 추운 날씨 때문에 사랑방 대신 윤여림(78)씨 집에 모여 송년회를 열었다.

송전탑 건설을 막기위해 한겨울 눈을 맞으면서도 농성하던 밀양 주민들 모습.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제공
송전탑 건설을 막기위해 한겨울 눈을 맞으면서도 농성하던 밀양 주민들 모습.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제공
윤씨는 “주민 반대를 막기 위해 정부와 한전은 주민들에게 공짜 돈을 안겨줬다. 하지만 공짜 돈은 사약과도 같다. 결국 정부도 죽이고 주민도 죽일 것이다. 우리 밀양의 송전탑 문제도 국회가 청문회를 열어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희경(81)씨는 “돈을 받고 데모한다, 데모에 나가지 않으려면 받았던 돈을 모두 돌려줘야 한다 등등 온갖 헛소문이 퍼졌다. 이젠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아니다’고 말하기도 지쳤다.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어 노인회관도 더이상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종범(58)씨는 “정부는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를 두고 찬반 논리로 갈등을 조장해 주민들을 이간질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나 사드 배치 등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마치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더라. 정부가 국민공동체·지역공동체·마을공동체 파괴의 주범이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안타까워 했다.

‘밀양 765㎸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마을공동체 파괴 문제의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기 위해 김경수 국회의원(더민주·김해을)과 공동으로 ‘마을공동체 파괴 진상조사단’을 꾸릴 계획이다.

김준한 대책위 공동대표는 “진상조사를 통해 주민들이 12년째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밝혀냄으로써 정부와 한전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제도 개선까지 이끌어내고자 한다. 마을공동체 회복과 재산·건강 피해 회복을 해야만 주민들이 예전처럼 일상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수 의원은 “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마을공동체가 파괴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파괴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주민간담회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차원의 조사를 벌여, 내년 3월께 그 결과를 보고서로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밀양/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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