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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재취업 함께 ‘조립’…노동자들 은퇴공포 ‘훌훌’

등록 2013-06-09 22:25수정 2013-06-10 08:32

지난 5일 오후 울산 동구 울산과학대 안 현대중공업 인재교육원에서 열린 은퇴설계 지원 프로그램 교육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창업세계 맛보기’ 시간에 조별 토론을 거쳐 마련한 창업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울산 동구 울산과학대 안 현대중공업 인재교육원에서 열린 은퇴설계 지원 프로그램 교육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창업세계 맛보기’ 시간에 조별 토론을 거쳐 마련한 창업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영남 쏙] 현대중 퇴직예정자 지원 프로그램
1974년 울산에 첫 조선소를 준공한 현대중공업은 2만5000여명이 일하는 울산의 대표적 기업이다. 베이비붐 세대 노동자 1만여명이 향후 10년 안에 정년을 맞는다. 노사가 손잡고 퇴직 노동자 인생설계 돕기에 나섰다는데….

베이비붐세대 무더기 퇴직 눈앞
생산·사무직 1800여명 대상 교육

‘은퇴설계’ 3단계 걸쳐 40시간 공부
사례연구·토론 통해 제2인생 준비

“막연한 노후 구체적 가닥 잡혀”
“회사·국가가 적극 지원 나서야”

“우리 ‘잘살아보세’조는 청소대행업체로 정했습니다. 사무실 임대료 3000만원에 트럭 한 대 2000만원, 공구세트 100만원, 청소기 50만원, 인건비하고 식대 제하고 돈이 조금 남네요.”

“기존에 청소대행업체가 많이 있죠? 어떤 차이가 있나요? 경쟁에서 이길 특별한 아이템이나 노하우라도 있나요?”

지난 5일 오후 울산 동구 울산과학대 안 현대중공업 인재교육원. 내년과 후년 정년을 앞둔 이 회사의 1954년과 1955년생 생산직 노동자들이 노사가 함께 마련한 ‘은퇴설계 지원 프로그램’에 참가해 ‘창업세계 맛보기’ 교육을 받고 있었다. 6명씩 8개 조를 이뤄 ‘1억원의 자금으로 창업 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조별 토론을 거쳐 정한 뒤 발표하면 강사의 간단한 평이 이어졌다. 교육은 일방적인 강의보다 강사와 교육생 간 또는 교육생끼리 대화와 토론 위주로 진행됐다.

현대중공업 노조 노동문화정책연구소 류대곤 부장은 “제대로 준비 안 된 창업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 이 교육의 취지다. 퇴직 후 바뀌는 내 삶을 미리 체험해보고 준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창업세계 맛보기’ 외에도 ‘재취업 준비’ ‘귀농·귀촌’ ‘사회활동’ 등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 일정은 나흘 32시간이다. 첫날엔 내 인생의 발자취 돌아보기, 둘쨋날엔 퇴직 전후의 삶과 나의 특성 발견하기, 셋쨋날엔 재취업과 창업, 귀농·귀촌, 사회활동 탐색, 넷쨋날엔 제2의 인생계획 세우기로 이어진다.

1978년 입사해 35년간 근무한 백덕제(58·조선판넬조립부)씨는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사흘째 교육을 받으면서 퇴직 뒤 내 삶에 대해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기오(58·동력부)씨는 “퇴직 이후 생길 수 있는 가족간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교육에 포함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은퇴설계 지원 프로그램은 1955~64년 태어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 노동자들의 본격적인 정년을 앞두고 마련됐다. 이들의 퇴직 뒤 삶을 설계하고 생계나 건강 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정부 지원을 받아 현대중공업 노사가 함께 기획했다. 프로그램은 집체교육, 심층상담, 그룹별 교육 등 3단계에 40시간씩 진행된다. 집체교육은 지난달 7일부터 시작해 오는 10월18일 모두 18기로 나눠 내년과 후년에 정년 할 생산직·사무직 1800여명 전원을 대상으로 한다. 노동문화정책연구소 류 부장은 “1단계 집체교육만큼은 회사에서 교육 인사명령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 노사가 퇴직 지원 교육에 힘 쏟는 것은 정년퇴직자가 2014년 804명, 2015년 976명으로 계속 늘어나 2023년까지 10년 동안 1만명을 넘어설 만큼 이 회사가 베이비붐 세대의 대표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다. 김진필 노조위원장은 “2011년 9월 정년퇴직 예정자 2000명을 설문조사했더니, 퇴직 이후 준비가 돼 있다는 응답이 5.9%밖에 안 됐다. 93.7%가 퇴직 지원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회사에 제안해 함께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박삼현 노동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은 “대기업에 다니면서 월급·상여금 제때 나오지, 아무런 고민 할 일 없다가 막상 퇴직하게 되면 대부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한다. 이런 퇴직자들이 대기업에서 대량으로 쏟아지고 중소기업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텐데, 이들이 회사 밖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돕지 않으면 사회복지 등 각종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게 들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중공업 말고도 현대자동차와 포스코, 케이티(KT) 등 일부 대기업이 몇년 전부터 기업별 전담부서도 두고 퇴직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노조와 무관하게 운영되며 기업 경영전략이나 경기상황에 따라 안정적이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에선 최근 노사가 ‘고령화 대책 노사공동위원회’ 상견례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급속한 고령화와 정년을 앞둔 장기근속 노동자의 노후생활 보장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우조선해양도 노조가 올해 회사 쪽과의 협상에서 정년퇴직 지원 프로그램 도입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노사 함께 기획…정부는 재정 지원
연구진 꾸려 ‘맞춤형 프로그램’ 개발

‘은퇴설계 교육’ 준비 과정은

현대중공업의 정년퇴직 예정자들을 위한 은퇴설계 지원 프로그램은 노사가 기획단계부터 머리를 맞대고 개발해,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처음 적용·시행한 사례다.

노조는 2011년 8월부터 부설 노동문화정책연구소를 통해 퇴직 지원제도 프로그램 연구에 나서 퇴직 예정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회사 쪽과 함께 연구전담팀을 꾸렸다. 김규덕 현대중공업 노사협력실 부장은 “베이비붐 세대들의 대규모 은퇴를 앞두고 이들의 안정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중 노조에서 퇴직자 지원에 관한 연구를 제안해와 함께 준비했다”고 말했다.

현대중 노사가 진행하던 연구는 지난해 4월 노사발전재단의 노사파트너십 사업으로 선정돼 정부의 재정 지원을 일부 받고, 한국고용정보원·한국노동연구원·비전노동센터·울산대·㈜좋은일자리 등의 연구진으로 자문위원회가 꾸려지면서 탄력을 받았다. 당시 노조 노동문화정책연구소장은 김진필 현 노조위원장이었고, 노동연구원에선 방하남 현 고용노동부 장관이 선임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연구진은 각종 사회정보에 취약한 생산직 노동자들이 퇴직 이후 인생 2라운드를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게 돕고 고령화 사회에 한발 앞서 대응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구체적으로 △사회보장제도, 재취업, 창업, 귀농, 여가생활 등에 관한 정보 제공 △노후 자산관리 등 개인 특성에 맞는 인생설계 지원을 통해, 정년 이후 문제점을 미리 해소할 수 있도록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연구진은 지난해 9월 국내외 사례 조사, 10월 1954~60년생 100명 대상의 시범운영도 했다.

박삼현 노동문화정책연구소장은 “교육과정에 정년퇴직자들의 단계별 심리상황도 반영했다. 매주 교육이 끝나면 만족도 조사를 통해 보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필 노조위원장은 “입사부터 정년까지 연령대별 노동자들의 생애설계 지원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있다. 퇴직지원센터도 지어 정년퇴직자들이 함께 이용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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