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가 9일 잠정 합의에 이른 한진중공업 사태는 지난해 12월15일 생산직 직원 1100여명 가운데 400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회사 쪽 통보로 시작됐다. 당시 회사는 2년 동안 선박 수주를 하지 못해 생존의 기로에 놓였다고 주장했지만, 노조는 구조조정 명분을 쌓으려고 일부러 수주를 하지 않았다며 닷새 뒤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듬해 1월6일 새벽 홀로 영도조선소 85호 선박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고공 농성이 40일째 이어진 날, 회사 쪽은 희망퇴직을 거부한 170명을 정리해고했다. 85호 선박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전 한진중 노조위원장이 회사 쪽의 불성실한 교섭 태도에 항의하며 목숨을 끊은 곳이기도 하다.
노사가 파업과 직장폐쇄로 힘겨루기를 하던 6월11~12일 김 지도위원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실은 첫 희망버스가 부산을 찾았다. 희망버스를 계기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크게 늘어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맞서는 상징적 사건으로 떠올랐다. 한진중 사태가 개별 기업 노사 문제에서 노동계와 재계의 대리전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노사 모두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회사는 6월27일 법원 집행관까지 동원해 강제퇴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끌어냈으나, 노조는 정리해고 철회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같은 날 노조 집행부가 상급단체인 전국금속노동조합과 정리해고자들의 뜻을 묻지 않은 채 파업 철회를 담은 노사이행합의서를 체결했으나, 이에 아랑곳없이 더 많은 시민들의 희망버스 행렬이 이어졌다.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양쪽의 교섭은 지난달 7일 돌파구를 찾았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정리해고자들의 1년 안 재고용과 해고기간 생계지원금 2000만원 지급을 뼈대로 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나흘 뒤 조 회장과 박상철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이 만나면서 타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뒤로도 노사 협상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리해고자들의 해고기간 근속연수 인정 등을 두고 한때 협상이 결렬되는 위기도 맞았다. 하지만 8일 밤샘 협상에서 입장 차이를 크게 좁힌 노사 각 5명의 교섭팀은 9일 오전 10시부터 다시 머리를 맞댔고, 40분 만에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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