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본래 마음자리로서 태어났고 지금도 그것으로 존재하지만 자기 오감과 육식활동에 의해 분별된 세상을 진짜 현실이라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훈습된 이분별하는 습관이 그런 환영세계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우리는 다른 대상들과 동일한 몸을 내 몸이라 여기며 특별히 대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식활동과 동일한 내 생각, 느낌, 감정을 나 또는 내것이라 착각하여 그 역시 다른 사람의 것보다 특별대우하는 습관 속에 길들여져 살아갑니다.
그런 오랜 습관에 길들여진 존재 방식으로는 본래 마음자리를 볼 수가 없지요. 그래서 깨닫고자 하는 이라면 반드시 한가지 방편에 깊이 의지하여 오랜 내분별하는 습관을 깨부수거나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걸 수행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그 배경과 함께 보지 않고 분별심에 의해 배경의 공간과는 분리하여 대상을 따로 봅니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그 이름을 습득하거나 기억해냄으로써 그것이 배경과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또 소리를 들을 때에도 우린 배경의 침묵이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만 따로 분리하여 마치 그 소리만 따로 존재하는 듯 분별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소리든 배경의 침묵과 분리되어 홀로 있는 소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게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 배경의 무느낌과 분리되어 홀로 살아있는 느낌이란 없습니다. 마치 파도만 있고 바다는 없다는 어리석은 분별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고 듣고 느끼는 분별 행위의 배경으로서 존재하는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본래 마음자리입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이 대상, 소리, 자극적 느낌에 치우쳐 있으므로 중도를 잃고서 자기가 쉽게 인식분별하고 집착하는 대상에 따라다니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하게 눈앞에 실재하는 이 본래 마음자리를 도무지 몰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란 보이는 대상보다, 들리는 소리보다, 느껴지는 느낌보다 더 먼저 그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에 이미 있는 바다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아무것도 없다든가 공간만 있다든가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자리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냥 생각으로 붙여버린 이름에 불과합니다. 생각으로 이름만 따라다니면 영원히 실상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합니다.
이 자리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 참스승은 그것을 정말로 발견하게 해줍니다. 모든 생각을 중지하고 침묵할 때 그것은 이미 눈앞에 현존하지만 우리들은 계속 분별만 하는 이 개체마음에 갇혀서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글 김연수/피올라마음학교 교장·특허법인 한양 대표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