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라 해서 내가 일체 없기만 하다면 그건 중도가 아닙니다. 동시에 관점만 달리하면 모든 것이 다 내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부처라는 것은 한마디로 기독교의 하나님 자리이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분별심에 나 따로 너 따로 하나님 따로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모든 게 나를 의지해 있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몽땅 다 내 생각과 감각에 의지해 있다고 분별하니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 몸이나 나란 생각조차도 다 이 생명의식 한자리를 의지해서 생각과 감각이란 분별 속에 나타나는 일종의 환시요, 꿈 같은 현상입니다. 실상에서 당신은 지금 책상에 앉아 이 글을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참나 자리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각의 조합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실제는 본래 자리에서 이 모든 생각과 감각을 일으켜 자기와 자기 행위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내(주체)가 지금 무엇(대상)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참나 자리에서 깨어난다면 내가 뭘 한다는 꿈에서 번쩍 깨어납니다. 나란 것도 생각, 뭘 한다는 것도 생각, 알았다는 것도 생각이구나 하면서 여태까지 다 자기 생각과 감각에 속아왔음에 비로소 깨어나는 것입니다.
어디 생각뿐이겠습니까? 문득 생겨난 감정에 얼마나 끌려다녔습니까? 그러면서 난 우울하다느니 무슨 현상이 있어서 큰 문제라느니 하면서 자기란 꿈속에서 또 다시 그 나한테 뭔 일이 일어났다 꿈꾸지 않습니까?
나에게 실재하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참나 자리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도 우리는 그 안에 너도 만들고 걱정근심도 만들고 좋고 나쁜 일도 만들어서 제 생각과 감정 속에 지지고 볶으면서 아웅다웅 싸우는 게 아닌가요?
이제 참나 자리에 깨어나 보니 너도 나도 그 사람도 다 이것 아닙니까? 저 산도 하늘도 나무도 강아지나 고양이, 나는 새도 다 이것 아닙니까? 길가에 돌멩이나 모래 한알조차도 다 이것이니 이것 아닌 게 있습니까? 이것은 태초 이전부터 있었고 끝도 없는 무한한 자리가 아닙니까? 우주 전체가 다 이것이고 일체 형상들이 다 이에 의지해 있지 않습니까?
깨어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나’라는 이 엄청난 진실에 번쩍 눈뜨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내가 죽고 신성(神性)이 되살아나는 대사건입니다.
글 김연수/피올라마음학교 교장·한양특허법인 대표변리사·<정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