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년으로 해외를 다녀오느라 한동안 원고를 못 보냈어요. 이탈리아 비아 프란치제나 순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종교보다 자연 순례 쪽이었지요. 봄날의 토스카나 들녘은, 사랑입니다! 이번 글의 사진은 직접 찍은 것들로 올립니다.
대지와 농경의 여신, 사랑과 생명의 표상
하늘과 땅, 바다와 산 같은 대자연을 표상하는 신들은 세계 모든 신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신인 동시에 늘 거기 있는 영원의 존재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은 언제든 그 품 안에서 움직이기 마련이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같은 수많은 우여곡절도.
대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생명으로서 변화의 과정에 있다. 하늘과 바다는 늘 같은 하늘, 같은 바다가 아니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대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대지는 다 다르다. 여름과 겨울의 땅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대지가 하나의 큰 생명이라 할 때, 거기에 우리가 쉬 헤아리지 못할 크나큰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 사랑과 기쁨이 샘솟는 푸른 대지와 분노와 슬픔으로 숨을 멈춘 검은 대지. 그럴듯하지 않은가.
흥미로운 것은 세계의 많은 신화가 대지의 신을 여신으로 사유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와 데메테르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둘을 비교하면 가이아가 태초의 원시적 대지에 해당하는 데 비해 데메테르는 농경문화가 성립되면서 사람들의 삶의 터로 거듭난 대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가이아와 달리 데메테르가 대지의 신인 동시에 곡물과 수확의 신 구실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사랑이 넘치는 자비로운 신으로 여겨진다. 이는 농경지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큰 덕과 관련된다. 대지가 전해주는 풍요로운 결실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신화 외에 농요(農謠) 같은 데서도 농사와 사랑은 깊은 연관성을 지니거니와, 농사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씨에서 싹이 터서 알곡을 맺거나 땅속에 감자와 고구마가 커가는 일은, 또는 나뭇가지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는 일은 사랑 그 자체다. 그러니 사랑의 신!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생명 순환의 상징
신화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페르세포네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제우스와의 인연으로 낳은,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페르세포네는 꽃과 식물을 돌보고 관장하는 여신으로, 그 일은 데메테르의 딸에 꼭 어울리는 신직이다. 대지에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 특히 화초와 곡식, 과수 등 농경물을 상징하는 신격이 곧 페르세포네다. 세상에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어머니인 대지에게, 그리고 농부들에게 페르세포네는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자식일 수밖에 없다. 하늘의 신이자 기후의 신으로서 대지와 교감하여 페르세포네를 낳은 제우스에게도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생명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피면 곧 지기 마련이고, 푸른 잎새는 누렇게 변하여 떨어지게 돼 있다. 밀과 보리와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의 푸른 줄기는 때가 되면 검게 변하면서 이운다. 아름답고 소중한 페르세포네도 전락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생명력 넘치는 봄여름의 들판과 황량한 겨울 들판 사이의 아득한 거리. 그것이 페르세포네의 운명이고, 그를 자식으로 둔 대지 데메테르의 운명이다.
신화는 이와 같은 자연적 이치를 생동하는 서사로 표현한다. 지하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서 땅속으로 끌고 들어간 일이 그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풀이하듯이, 이는 가을을 거치면서 식물들이 조락해서 죽음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표상한다. 신화는 페르세포네를 잃은 데메테르가 슬픔과 분노에 잠겨 곡물을 돌보는 일을 그만뒀다고 하거니와, 이는 겨울로 접어들면서 대지가 검고 차갑게 굳어버리는 상황을 나타낸다. 황량한 겨울 들판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미지적 상징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잘 알듯이 겨울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죽음 상태에 있던 씨앗은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워 아름다운 생명력으로 대지를 수놓는다. 지하에 잠겨 있던, 하데스에게 잡혀 있던 페르세포네가 다시 지상으로 나와 데메테르의 품에서 즐거이 노니는 시기다. 아름다운 축복으로 넘실대는 사랑의 대지! 글의 서두에 봄날의 토스카나 들판이 사랑이라고 말한 것은, 외적 풍경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가, 그리고 제우스와 하데스가 어울려 펼쳐내는 갸륵한 생명의 이치를 포함해서 한 말이다.
겨울이 있기에 봄은 더 아름다운 법.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영원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현시한다. 앞으로도 무한히 이어질 일이다. 그 여신들을 응감하며 푸른 들녘, 또는 검은 들녘의 일부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하늘과 땅 사이의 자청비, 뭐든 다 해낼 듯했던 그
데메테르나 페르세포네와 비견할 한국의 농경신을 든다면 바로 자청비일 것이다. 제주도 신화 <세경본풀이>의 주인공이다. 세경신의 근본을 풀어내는 신화라는 뜻인데, ‘세경(世經)은 곧 농경신을 일컫는 말이다. 세경신은 상세경 문도령과 중세경 자청비, 하세경 정수남까지 셋이지만, 그중 핵심은 단연 자청비다. 한쪽에 하늘, 다른 쪽에 땅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신 자청비는 데메테르와 마찬가지로 여신이다. 하지만 자청비의 존재적 정체성은 데메테르나 페르세포네와 다르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가 각각 대지와 식물 등을 표상하는 것과 달리 자청비가 표상하는 것은 인간이다. 대지 위에서 움직이면서 동물을 부리고 식물을 키우는 인간 말이다. 요컨대 자청비는 ‘농부’의 자리에 있다.
신화 속의 자청비는 처음부터 농부, 또는 농경신은 아니었다. 자식을 간절히 원했던 어느 대갓집의 귀한 딸이었다. 자청비는 어려서부터 베 짜는 일을 좋아하고 또 잘했지만, 그것은 생업이 아니라 ‘놀이’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녀인 정술데기를 따라 강물에서 빨래를 한 것도 노동이 아니라 손을 하얗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화장법이었다. 뭐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 그가 자청비였다. ‘자청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과 잘 어울리는 면모다.
그 자청비가 바라본 것은 땅보다는 하늘이었다. 주천강에서 재미 삼아 빨래를 하다 만난 하늘사람 문도령이 마음에 들어오자 자청비는 거침없이 그에게로 향한다. 남장하고서 문도령과 함께 공부를 떠난 자청비는 결국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든다. 힘들게 마음을 얻는 형태가 아니었다. 상대의 마음을 가지고 놀다시피 해서 그가 완전히 자기에게 빠져들게 한 것이었다. 연애의 고수! 자신감 충만한 능력자 자청비에게 하늘은 멀고 어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무엇이었다.
농사라는 화두로 돌아온다면, 이러한 자청비의 모습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또는 당연한 나의 편으로 여기는 인간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발로 땅을 디디고 머리로 하늘을 우러르는 나, 거칠 것 없다. 그 하늘 그 땅은 늘 나를 빛나게 할 것이므로. 내가 움직이는 대로 열매는 착착 맺어질 것이므로. 돌아보면, 철부지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러했고, 초보 농부 시절의 내가 그러했다. 알아서 잘 자라고 열매를 착착 맺어주는 옥수수, 호박과 땅콩과 고구마. ‘뭐 이 정도 농사쯤이야!’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무소불위 자청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보 농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반과 좌절, 시련과 방황이었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감당하기에 벅찬 것들이었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이어 휘청대다
뜨거운 사랑을 꿈처럼 나눈 뒤 철석같은 약속을 남기고 떠난 문도령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 그 약속은 버려진 헌신짝이 된다. 한번 떠나더니 단 한번의 소식도 없는 남자. 하늘 사람이 아니었던 자청비로서는 속절없고 대책 없는 일이었다. 하염없이 날을 보내고 달을 보내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에 솟아나는 건 억울함과 성화뿐이었다.
다시 농사로 돌아오면, 그것이 하늘이다. 햇살을 내리고 비를 주어서 농작물을 키워주는 고마운 하늘. 하지만 그 하늘은 때로 얼마나 무심한 것인지! 기다리는 비 대신 쨍쨍한 햇빛만 줄곧 내리는 것이, 또는 기다리는 햇살 대신 먹구름과 궂은비를 그침 없이 내리는 것이 저 하늘이다. 원망해봤자 소용없으니 아득할 따름이다. 나의 올해 고구마 농사가 그랬다. 풍요를 확신하며 호기롭게 모종을 심고 비닐을 덮었지만 숨구멍을 내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모종이 타죽은 뒤였다. 그리고 이어진 긴 가뭄의 날들. 다시 심은 모종들도 비실비실 말라가는 중이다.
하늘 문도령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자청비의 형상은 죽어가는 땅 위에서 무력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농부의 모습을 표상한다. 하늘의 무심한 가혹함이다.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를 용인함으로써 그를 죽음 상태로 몰고 간 제우스 또한 하늘이었다. 그때의 데메테르가 그러했듯이, 자청비가 발 디딘 땅도 좌절감과 분노로 신음하고 폭주했으리라.
<세경본풀이>에서 땅의 폭주와 반란은 정수남이라는 인물의 일로 서사화된다. 자청비의 종이었던 정수남은 신화에서 문도령의 대극에 위치한다. 그는 밑바닥의 존재이자 야생적이며 본능적 존재로서, 천(天)에 대한 지(地), 신(神)에 대한 물(物)을 표상한다. 문도령으로 표상되는 하늘이 자청비를 외면할 때, 정수남이 폭주한다. 굴미굴산 거친 산속에서 야만의 폭력으로 자청비를 범하려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복종할 줄로만 여겼던 땅의, 또는 짐승의 반란! 그 공격 앞에 자청비는 당황하며 휘청댄다. 인간은 하늘과 땅에 차례로 배반당한 농부다.
자청비의 사랑은 그렇게 원망이 되고 절망이 된다. 과연 하늘과 땅은 마침내 자청비를 구원할 것인지.
층하와 분별을 넘어서 세상의 일부가 되다
예상했겠지만, 자청비는 그 시험을 이겨낸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이지만, 믿었던 부모에게까지 원성을 들으며 쫓겨나지만, 결국 땅을 살리고 하늘을 품에 안는다. 그 출발은 제 손으로 죽인 정수남의 재생이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던 정수남을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던 자청비는 그가 자신의 오래고 귀한 동반자였음을 깨닫고서, 정수남(또는 땅, 짐승)이 있어서 자기가 살 수 있었던 것임을 깨닫고서 맨가슴으로 그 원혼을 품고 서천꽃밭의 생명꽃으로 시신을 재생한다. 그러자 우악스럽던 정수남은, 또는 거칠고 모질었던 땅은 살갑고 귀한 동반자로 거듭난다. 하세경 정수남의 탄생이다.
자청비가 거친 땅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품에 안자 또 다른 길이 열린다. 하늘이 내려와 길을 열어준다. 노각성자부줄을 타고 하늘로 오른 자청비는 문도령과 재회하고 그와 결혼한다. 무심하던 하늘과의 극적인 접속! 하늘은 여전히 냉정해서 자청비를 불구덩이로 몰아넣지만, 그가 눈물로 기원하자 비가 내려 불을 끈다. 불타는 대지를 적시는 생명의 비! 결국은 그렇게 나의 편이 되어줄 하늘이었다. 믿음과 의지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하늘과 접속하는 자청비의 모습은 하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농부들과 다름없다. 농부가 어찌 밭을 탓하고 하늘을 탓하랴. 믿음 속에 기다리면서 내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그렇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어서 밭으로 나가 물을 길어다가 모종들을 하나하나 적셔주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하늘과 땅의 처분을 기다릴 따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하늘이든 땅이든 다 제 뜻대로 되리라 여겼던 초보 농부 자청비는 시련과 좌절의 긴 터널을 거치면서 진정한 생명의 존재로 거듭난다. 일컬어 농사의 신! 그의 진짜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이다. 하늘과 땅은 그에게 더이상 ‘대상’이 아니다. 서로 연결되고 어우러진 또 다른 나다. 앞서 자청비가 상세경과 하세경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는데, 서로 이어져 하나라고 하는 것이 더 절실한 표현이 된다.
자청비는 풍요의 여신임에도 문도령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없다. 오랜 의문이었는데, 이제 그 답을 새로 깨닫는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무수한 푸른 싹과 알곡과 열매들이 하늘과 결혼해서 낳은 그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땅의 자식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논농사 밭농사만이 아니라 사람 농사, 곧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기준과 욕심으로 움직일 때 결국 생겨나는 것은 틈과 벽, 배반과 좌절이다. 다 내려놓고서 기꺼이 포용할 때, 모두는 또 나는 갸륵한 나가 된다. 받아들이고 감사할 일이다. 천지신명이 허여한 크나큰 축복을! 사랑을!
이번 봄의 순례 여행은 페르세포네가 아름답게 노니는 때의 여행이었지요. 다음 순례 여행은 하데스와 정수남의 때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홀로 길 위에 던져진 자청비가 되어서 겨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서천서역 세상 끝(Fisterra)까지 걸어볼 생각입니다.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마침내 활짝 피어날 생명 또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면서요. 제 방식의 신화 여행입니다.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