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위기에 대한 신화적 성찰
질병이라는 재앙 , 또는 신
2021 년의 인간세계를 한 마디로 명명한다면 무엇이 될까 ? 답은 ‘ 코로나 팬데믹 ’ 일 것이다 . 검은 그림자처럼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전세계로 퍼져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 국제 사회경제 시스템으로부터 개개인의 일상과 내면심리까지 ,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
돌아보면 지금의 코로나만이 아니다 . 그에 앞서 사스와 신종플루와 메르스 등이 있었고 , 더 올라가면 스페인독감과 페스트 ( 흑사병 ) 의 대유행이 있었다 . 질병이 다 그렇지만 , 무섭게 퍼져 나가는 전염병은 인간에게 특히 큰 재앙이 된다 . 가장 근본적인 것 ‘ 생명 ’ 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이 세상에 질병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 이는 허튼 바람일 따름이다 .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움직인다 . 탄생과 커나감이 있으면 파괴와 소멸이 있으니 , 이는 지상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 유한한 물적 존재로서 만유생명의 가없는 유동성 . 질병은 그 본원적 운동의 빠질 수 없는 요소다 . 그것은 하나의 자연 ( 自然 ) 이다 . 신적 섭리를 구성하는 .
질병은 누구라도 만나기 싫어하는 대상이다 . 고통 속에 심신을 허물어뜨리는 모진 불청객을 신 ( 神 ) 으로 사유하고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 . 그래서인지 세계의 수많은 신화들에서 질병신은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다 . 하지만 그런 사례는 , 없지 않다 .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론은 치유의 신인 동시에 질병의 신으로 사유되었으며 , 바빌론 신화의 네르갈은 죽음과 전쟁의 신인 동시에 역병의 신이었다 . 중국 신화에서도 여악 ( 呂岳 ) 이라는 역병의 신과 만날 수 있다 . 인도 벵갈루루에서 모셔지는 안남마는 지역신인 동시에 천연두의 신이라고 한다 .
한국은 질병신에 대한 사유가 특별히 발달한 나라다 . 혹시 ‘ 손님마마 ’ 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 무서운 전염병 천연두를 일컫는 민간의 호칭이다 . 명신손님 , 호구별성 , 별상 , 대별상 등으로도 불린 손님마마는 굿에서 제석신과 칠성신 , 성주신 같은 큰 신들과 나란히 모셔졌으며 , 오늘날까지도 의례가 남아 있다 . 한 편의 길고 인상적인 신화 ( 神話 ) 와 함께 . 거기에는 질병에 대한 본원적 성찰이 함축돼 있는바 ,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다 .
질병에 대처하는 신화적 방식
질병신에 대한 한국적 사유를 살피기에 앞서 , 세계 신화에서 질병을 대하는 방식을 먼저 본다 . 서구의 신화들에서 질병은 수용과 존중보다는 공격과 격퇴의 대상이었다 . 비근한 예로 ,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몹쓸병에 시달릴 때 이를 ‘ 마귀의 장난 ’ 으로 여겨서 그것을 물리치는 안수기도를 행하곤 한다 . 이러한 행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 성경에서 예수와 여러 성인들이 성령의 힘으로 병자를 치유한 수많은 일화들과 만날 수 있다 . 질병의 맞은편에 신 ( 神 ) 이 있는 셈이다 .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집트나 그리스 신화에서도 확인된다 . 그 기본 화두는 ‘ 의술의 신 ’ 이다 . 질병과 맞서서 이를 물리치는 존재가 중요한 신으로 모셔졌으니 , 이집트의 토트와 그리스의 아스클레피오스 등이 그들이다 . 토트는 의술의 신인 동시에 지혜와 언어의 신이거니와 , 그 직능들을 연결하는 공통분모는 ‘ 문명 ’ 이다 . 인간이 스스로 발달시켜온 능력과 체계로 질병이라는 자연재앙을 물리치는 형국이다 . ‘ 만물의 영장 ’ 으로서 인간의 신령한 존재성이다 .
그리스 신화의 아스클레피오스는 세계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의술신이다 . 아폴론과 코로니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클레피오스는 출생부터가 극적이었다 . 그는 아폴론의 오해와 분노로 죽음을 당한 코로니스의 시체 속에서 꺼내진 아이였다 . 일컬어 , 죽음 속에서의 생환이다 . 그런 이력 때문인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신령한 의술을 발휘했다고 한다 . 옛사람들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하루를 보내기만 해도 모든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하니 ,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존을 확인할 수 있다 .
뱀이 감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유명한 아스클레피오스는 오늘날까지도 의술과 치료의 상징으로 통하고 있다 . 그의 딸들인 이아소와 훼기이아 , 아케소 , 아글레이아 , 파나케이아 등이 모두 치료의 여신으로 여겨지거니와 , 수많은 의술신들이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고금의 뛰어난 의사들이 또한 그 당사자들일 것이다 . 일컬어 , 신의 ( 神醫 )! 신의로 말하자면 동양의 화타나 편작 , 유의태와 허준 등도 빼놓을 수 없겠다 . 계보를 따진다면 아스클레피오스보다는 여와나 서왕모의 후예에 더 가깝겠지만 .
의술을 통한 질병 퇴치의 신화 . 이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인간중심적이다 . 그런데 거기 하나의 반전이 있으니 아스클레피오스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 그의 죽음에는 서로 다른 설이 있다 . 먼저 , 그가 사람을 치료하면서 황금을 받았기 때문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서 죽었다는 것 . 생명이 물질로 치환되는 역리에 대한 징벌의 서사다 . 다음으로 , 그가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서 저승이 비게 되자 하데스의 청으로 제우스가 그를 죽였다는 것 . 이는 명백히 자연의 생명적 섭리를 반영한 서사에 해당한다 . 사람은 병들고 죽는 것이 순리이며 , 그래야 우주의 생명체계가 순환적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 그렇다 . 아무리 신령한 의술이라 하더라도 자연의 본원적 섭리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바는 아폴론의 양면성이다 . 태양신 아폴론은 생명과 치유의 신인 동시에 질병의 신으로 사유되기도 한다 . 호머의 < 일리아스 > 에서 아폴론은 그리스인들에게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어 역병의 재앙을 내린다 . 신적 체계를 거스른 인간의 오만과 방자함에 대한 응보였다 . 생명을 지켜주는 신이 생명을 파괴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것 , 가슴 깊이 새길 일이다 . 어찌 그렇지 않을까 . 하늘에 뜬 태양은 인간에게 축복이지만 때로는 저주이기도 하다 . 만유의 본원적 양면성 !
아폴론이 현시하는 양면성과 관련하여 인도 신화의 시바 (Shiva) 를 환기하게 된다 . 창조의 신 브라흐마에 대한 파괴의 신으로서 시바가 행하는 권능에는 필시 역병도 포함될 것이다 . 시바의 아들 가나바티가 질병과 재앙의 신으로 여겨졌음은 단적인 증좌가 된다 .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바의 파괴가 재앙인 동시에 새로운 창조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 인간이 아닌 신의 차원에서 볼 때 , 질병의 유행은 어긋난 세계질서의 재구성 과정일 수 있다 . ‘ 신의 화살 ’ 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부조리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 . 그것이 신화가 전하는 계시다 .
천연두신 명신손님과 코로나 사이
이제 한국의 질병신 손님마마 이야기로 넘어간다 . 한국에서 전해지는 천연두 신 관련 신화로는 제주도의 ‘ 마누라본풀이 ’ 와 동해안의 ‘ 손님굿 ’ 이 있는데 , 여기서 볼 것은 ‘ 손님굿 ’ 이다 . 손님굿에 의하면 마마신 명신손님은 중국땅 세천산에서 53 명이 태어났다고 한다 . 그 가운데 세 명 또는 네 명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움직이는 가운데 생겨난 여러 우여곡절을 전하는 것이 곧 신화의 내용이다 . 그 신들은 호반손님과 문관손님 , 제석손님 , 각시손님 등으로 말해진다 .
신화의 핵심 화두는 이들 무서운 불청객 전염병 신들을 어떻게 맞이할까의 문제다 . 이에 대해 신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을 서사화한다 . 하나는 이를 경시해서 넘보거나 물리적으로 막아서는 방식이고 , 또 하나는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방식이다 . 그 대응 여하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지거니와 , 그 일련의 형상에서 코로나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대응을 보게 된다 . 이에 대해 한 편의 논문 ( 신동흔 , 코로나 위기에 대한 신화적 ・ 인문학적 성찰 , 2020) 으로 자세히 고찰한 바 있거니와 , 핵심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
먼저 압록강 뱃사공 . 조선사람 중 제일 먼저 손님들을 맞이한 존재다 . 그가 강을 건너고자 하는 손님신들을 보며 요구한 것은 각시손님의 수청이었다 . 감히 여신과 하룻밤을 보내고자 한 것이었다 . 그 결과는 처참했다 . 분노한 각시손님은 단칼로 뱃사공의 목을 벤 뒤 그 집에 찾아가 자식 칠형제를 차례로 잡아 죽인다 . 뱃사공 아내의 간청으로 막내는 살려줬지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였다 . 전염병의 무서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 감히 질병신을 넘보면서 어디 한번 놀아보자고 한 뱃사공의 모습에서 이른바 ‘ 코로나 파티 ’ 를 즐기던 이들의 모습을 본다 . 그 결과는 아는 대로다 . 참혹한 화가 자신은 물론 주변에까지 미치니 최악의 재앙이 된다 .
한양 장안의 큰 부자이자 유지였던 김장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 그는 손님신들을 무시하고 위력으로 누르려 한다 . 자기 집 담장이 높으니 문을 닫아걸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 일컬어 봉쇄 정책 . 하지만 감염병의 힘은 그 이상이다 . 손님신은 보란 듯이 집안으로 스며든다 . 그러자 김장자가 한 일은 똥물을 뿌리고 매운 고춧불을 피우는 식의 무모한 공격이었다 . 오만에 기초한 얕은 술수와 허튼 미봉책 . 그 결과는 생떼같은 자식의 처참한 죽음이었고 , 집안의 멸망이었다 . 김장자는 앞의 뱃사공과 달리 사회 지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니와 , 그에게서 오만과 경시 , 속임수로 코로나를 대했다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시민들의 안전과 목숨을 위해한 세계 여러 통치자들의 모습을 본다 . 이리저리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으시리라 .
인간이 어찌 신을 넘어설 수 있을까 . 자연신으로서의 감염병은 물리적 봉쇄나 섣부른 공격으로 물리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자연의 크나큰 생명적 이치와 작동방식은 인간의 합리적 인지 이상의 것이다 . 그렇다면 그 신적인 작용 앞에서 인간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 그냥 손 놓고서 모든 것을 맡기는 것 ? 아니 , 그럴 리 없다 .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은 자연만물의 절대적 준칙이다 . 우리는 최선을 다해 감염병에 대처해서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 문제는 그 방법이다 . 신화는 그 대처가 겸손과 경계 , 인정과 존중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
손님굿에서 김장자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는 노구할미다 . 가난하고 고단한 할미는 이름없는 서민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 그는 손님신들이 찾아오자 집을 깨끗이 치운 뒤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챙긴다 . 감염병이 찾아든 상황에서 최대한의 겸손과 정성으로 이를 감당하고 풀어나가는 모습이다 . 그러자 전화위복의 역전이 일어난다 . 그 정성 앞에 불청객은 스스로 물러나면서 노구할미 집에 큰 복을 남긴다 . 어찌 그렇지 않을까 . 큰 위기를 잘 이겨내면 그것은 삶의 힘이 된다 . 지금의 코로나 위기도 최선을 다해 이를 극복하면 전화위복의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일이다 . 노구할미가 그랬듯이 ,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힘을 내고 길을 찾아야 한다 . 현재를 살아가는 힘과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 ‘ 현실 부정 ’ 은 답이 아니다 .
손님굿 신화에서 겸손과 정성으로 질병신들을 맞이한 것은 노구할미만이 아니었다 . 최정승과 이정승 , 영운선생 등의 지도층 인물들이 나서서 그 일을 행한다 . 이들은 앞장서서 부정 ( 不淨 ) 을 없애고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손님신을 맞이하며 , 죽어가는 아이를 정성껏 돌보아 구원한다 . 그리고 굿을 베풀어 뭇 사람들과 함께 신을 위무하고 배송한다 . 그 노력과 정성의 힘으로 손님신들은 이 땅을 떠나가게 된다 . 굿은 곧 정성이고 신명이니 , 질명신의 퇴거는 위아래가 하나되어 풀어낸 본원적 신명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코로나 위기에서 지금 우리에게 백신이나 치료제보다 더 필요한 것이 이와 같은 하나됨의 정성과 의지 , 그리고 희망적 믿음 아닐까 ?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신 ( 疫神 ) 의 침노로 병들어 누워있는 아내 앞에서 처용 ( 處容 ) 이 행한 일 또한 무너지는 마음을 스스로 다잡으면서 굿을 베푼 일이었다 . 위기와 고난 앞에서 오히려 차분해지고 강해지는 본원적 신명의 몸짓 . 그러자 그 힘에 감응한 전염병 역신은 스스로 물러가고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 그 후로 사람들은 대문에 처용의 화상 ( 초상화 ) 을 붙이게 됐다고 하거니와 , 이는 사람들이 처용의 마음과 몸짓을 자기것으로 삼은 상황의 표상이다 . 그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생각하면서 , 내 마음의 대문에 처용의 화상을 붙여본다 . 노구할미와 최정승 이정승 , 영운선생의 화상과 함께 .
마음속 코로나와의 신화적 공존
손님굿 속에는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 아버지 김장자 잘못으로 참혹하게 죽은 철현이 ( 철응이 ) 가 막내손님이 되어 명신손님들을 따라가는 장면이다 . 인간이 질병신으로 바뀌는 장면인데 , 인간과 질병의 생명적 연결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면모가 된다 .
어찌 철현이뿐일까 . 세상의 인간 누구라도 ‘ 질병의 몸 ’ 이 될 수 있다 . 멀리 볼 것 없이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다 . 내 몸에 여러 질병이 있고 , 마음에는 더 많은 질병이 넘나든다 . 우울과 무기력 , 분노와 공격성 등등 . 때로 그것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나의 심신을 온통 장악하기도 한다 . 지금 내 몸에는 코로나가 없지만 , 마음에는 코로나가 퍼져 있다 . ‘ 코로나 블루 ’ 로 불리는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과 상념들이 ……
질병에 대한 신화들을 떠올리면서 , 나의 심신을 오롯이 추스르고 세우는 일이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해야 할 최고의 과제임을 실감한다 . 이때 가장 큰 적은 오만과 소홀함 , 허튼 분노와 무모한 공격 따위일 것이다 . 손님굿 신화에서 뱃사공과 김장자가 빠져들었던 그 함정 말이다 . 공연히 화내고 손가락질하면서 공격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의 평정을 유지해 가는 것이 , 지금 내가 해야 할 소임을 더욱 성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것이 답이다 . 마음 깊은 곳의 신명을 이끌어내서 사람들과의 서사적 연대를 더욱 강화해 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오래 흘러온 신화가 전해주는 본원적 해법이다 .
결국 관건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 어떤 싸움인가 하면 귀한 존재성을 확인하는 신령한 몸짓으로서의 싸움 . 그 싸움을 훌륭히 감당하고 나면 , 뒷날 아득히 깨닫게 될 것이다 . 지금의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지를 .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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