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수도자] ⑥ 차이와 관용
식탁과 성지에서 벌어진 '차이'에 먹구름
인간적 예수 ‘순명’ 느끼며 ‘관용’의 눈물
'홀로' 살아온 독신 수도자들이 오랫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수녀님들은 서구식 입맛에도 길들여져 있었지만 토종인 스님과 교무님들은 우리 음식들에만 길들여져 있어서인지 음식들을 정성껏 준비해왔다. 그래서 순례단들이 현지 음식에 물릴 때면 토종 음식들을 식탁에 내놓곤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인도 부다가야의 호텔에서였다. 먼저 원불교 교무님들이 먹음직스런 김치를 내놓았다. 그러나 뒤따라 한 스님이 자신이 준비해온 김치를 내놓으면서 "이건 오신채를 넣지 않은 김치"라고 소개했다. 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 등 음욕을 돋운다 해서 사찰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채소'(오신채)를 넣지 않은 '순수 김치'라는 것이었다.
‘꼭 젓갈을 가져와야겠냐’는 한마디에 싸늘
식탁에 나란히 놓인 두 김치를 교무님과 수녀님들은 번갈아가며 먹었지만, 스님들은 오신채를 넣지 않은 김치만 먹었다. 그러다 보니 교무님들이 내놓은 김치는 한 식탁에 놓였음에도 스님들로부터 젓가락질 한 번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 김치의 설움은 곧 교무님들의 서운함으로 이어졌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밥맛이 없다고 하자 한 교무님이 젓갈을 꺼내서 내놓았다. 젓갈을 보자 환호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한 스님이 정색을 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러 오면서 꼭 그런 음식을 가져와야겠어요?"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고픈데 젓갈까지 성지에 가져와야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불교 교리 상으로는 젓갈을 먹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긴 여행에 지친 순례객들의 메스꺼운 속을 달래줄 자비심으로 젓갈을 준비해온 교무님으로선 스님의 지적을 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식탁에서 스님으로부터 꾸중 아닌 꾸중을 들은 것은 교무님만이 아니었다. 한 스님이 "기독교인은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하자, 수녀님이 놀라 젓가락을 놓은 채 말문을 잃었다.
식탁에서 종교 간 '차이'가 불거진 것이다. 이런 기미는 이미 첫 순례지인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부터 엿보였다. 부처님이 처음 전법을 시작한 녹야원에서 열린 법회에서 스님들이 절을 하는 사이 수녀님들이 그대로 앉아 있고, 교무님들도 수녀님들처럼 그대로 앉아 있자 스님들은 못내 섭섭해 했다.
신앙문 낭독에 고름 터지면서 숙소에 폭풍우
이런 와중에 영국에서 가톨릭 수장인 교황님께 드릴 순례단 공통의 선물에다 수녀님들이 '당신의 어린 딸들이'이라고 영어로 쓴 뒤 모두에게 사인을 하도록 하고,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스님들에게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기쁨을 위하여 기도합시다"라는 기독교 신앙문을 낭독하도록 하면서 곪았던 화농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밤 숙소인 수도원의 기도 방에 모든 삼소회원들 사이에선 비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쳤다. 차이를 관용하지 못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 갈등과 테러와 전쟁을 막고 평화의 씨앗을 심어보자는 순례 도중에.
다음 순례지는 '평화의 도시'란 말뜻을 지닌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로건일 뿐 예루살렘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이슬람을 믿는 팔레스타인들 간의 살해와 테러와 보복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도시였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들어서는 순례단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종교인과 종교 예식을 대할 때 어떻게 서로의 신앙과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고 떠난 여정에서 일어난 자기 마음 안의 갈등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의 ‘증언’
그런 회한 때문이었을까, 예수님의 고통이 순례단의 고통이 된 때문이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새워 기도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수녀님들 뿐 아니라 교무님들과 스님들까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달라"는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그 아픈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느껴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한 예수님의 그 순명에 공감한 때문이었을까.
순례단들은 종교를 떠나 눈물을 적시며 골고다 언덕을 올랐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은 채 숨을 다한 현장에서 순례단들은 오래도록 앉아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은 핍박받는 유대 민족의 구원자로 나서 압제자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 커녕 비참한 모습으로 허망하게 떠나갔다. 세속의 성공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절히 패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기 전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했다.
내편과 네편을 떠나 결국 로마와 유대인 동족들 양쪽 모두로부터 따돌림 받아 처절히 희롱당하고 고통 당한 예수님이 어떻게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일까. 그 때 예수님이 그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그토록 조롱하며 처참하게 죽인 사람들에게 대해서까지 잊지 않은 용서와 사랑이었다.
팔레스타인 소년 장기 이식 받은 이스라엘 소녀들
나 또한 순례단들과 같이 가슴으로 흐르는 눈물의 흐름에만 몸을 맡기고 있을 때 한 영상이 '부활한 예수님'마냥 떠올랐다. 유대인들로부터 더한 고통을 받은 한 팔레스타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순례를 떠나기 몇 달 전 텔레비전에서 본 모습이었다.
이스라엘의 한 아동병원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 소녀가 각각 심장과 폐, 간을 이식받았다. 열두 살 소녀 사마흐 가드반은 죽어가면서 5년 동안이나 심장 이식 수술을 기다려왔다. 종교적인 이유로 장기 기증을 꺼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장기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꺼져가는 생명을 바라만 보던 소녀들의 부모들은 장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구세주를 만난 듯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 뒤 의사는 "따님이 이식받은 장기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것"이라고 말했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팔레스타인 소년이 내 딸을 살리다니. 유대인 소녀들의 부모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소년은 열두 살 난 아흐마드였다. 귀여운 아이였다. 아흐마드는 라마단 단식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이슬람 축제에서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흐마드의 총을 보고 사격을 해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아흐마드는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의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비탄에 빠진 아흐마드의 부모는 두 시간 뒤 아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건 팔레스타인 사람이건, 대상은 관계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들을 쏜 이스라엘에 되레 ‘선물’을 준 어머니
나는 순례단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염했던 바위에 입을 맞췄다. 바위는 차가웠다. 그 차가운 감촉을 타고, 예수님의 기도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내 가슴에게 속삭였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은 가슴에 어떤 증오도 남지 않고, 오직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하나 가득이기 때문이라고. 어떤 상황이라도 지금 여기서 다 용서하고 지금 다 사랑하지 못하면, 천만 년을 살아도 그 삶은 원만해지고 완전해질 수 없다고. 나는 그 간절한 예수님의 기도가 갈등 속에서 마음 아파하던 삼소회원들의 기도가 되기를 기원했다. '평화'라는 슬로건만이 아니라,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는 아흐마드 어머니와 같은 그 마음이 수도자의 마음이 되기를 빌었다. 그것은 어쩌면 삼소회원들만이 아니라 말로는 평화와 용서와 사랑을 갈구하면서 내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가끔 한쪽에 간직해온 내 자신의 미움과 갈등과 폭력심을 향한 기원이었다.
아흐마드 어머니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예수님의 바위 위에 떨어졌다. 아흐마드의 어머니는 축제 기간 아들에게 안겨진 선물이 총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흐느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받은 상처가 너무 아파 끝없이 다른 사람을 상처 내는 삶을 보낸다. 그러나 누군가의 상처에선 눈물이 영롱한 진주로 바뀐다. 아흐마드 어머니가 진주같이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축제가 끝나기 전 이스라엘 소녀들에게 더 큰 선물을 주게 돼 기쁘다"고.
아흐마드의 어머니가 더 큰 선물을 준 사람은 이스라엘 소녀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슴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메아리를 심어주었다.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고.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온라인뉴스팀 장수경 기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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