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과 파괴로 주검 위에 세운 부와 문명 질서
사람-자연 함께 사는 ‘바보 중 바보’들 묵묵히
지구의 형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좋지 않다. 만약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미국 등 선진국의 부자들 15명은 비만이지만 12명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지구인 100명 가운데 무려 70명은 영양 부족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미국은 가난한 나라의 굶주리는 이들에게 가야 할 식량의 대부분을 육식을 위한 가축용 사료로 사용하고, 더구나 곡식값 하락을 막기 위해 곡창지대의 엄청난 밀밭을 불질러버리기도 한다.
인도인들이 연간 200㎏의 곡물을 소비하는 데 비해 미국인들은 무려 800㎏의 곡물을 소비한다. 모두 미국처럼 살기를 열망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현재 지구 인구 65억 가운데 미국처럼 곡물을 소비하는 이들이 25억만 되어도, 나머지 40억은 그 자리에서 모두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난파’ 지구호에 되레 ‘난도질’, 끝없는 인간 욕심
선진국들이 부를 쌓으며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했던 것이 실은 많은 이들의 주검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을 자각할 날은 언제일까.
20세기 100년 간 이 푸른 별 위의 생명체 가운데 포유류의 20%와 조류의 11%가 이미 멸종했거나 거의 멸종해가고 있다. 또 지구의 생명들이 숨쉬도록 산소를 내어주는 열대우림의 1500만㏊가 사라져버려 그곳에서 살던 동식물들이 생존 기반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의 물 가운데 4분의 3은 비가 되지 못한 채 대서양으로 그냥 흘러들어가고 있다. 이미 순환의 질서가 깨짐으로써 생명으로써 온전한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환경 파괴의 중심엔 늘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과 자본이 있다.
우주의 바다에 떠 있는 지구호가 난파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보수는커녕 오직 일신의 편리만을 위해 복판에 구멍을 내는 짓을 서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류의 탐욕과 이기심과 부조리를 알면 알수록 지구상에서 문제는 오직 ‘인간’이라는 생각 뿐이다.
서구의 정복적이고 파괴적인 문화는 문명이라는 단맛을 가져다주었지만 더 큰 환경적 재앙을 유발함으로써 다른 생명체는 물론 인류 자신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게 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지구는 재난으로 멸망할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면서 외계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찾지 못하면 인류는 멸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조차 지구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지구를 이 지경으로 만든 방식대로 끝없는 확장을 통해 돌파하려는 서구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는 외계의 식민지 개척조차 앞으로 100년 동안 서로 죽이는 일을 피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과연 100년 간 서로 죽이는 일을 피할 수 있을까.
홀태로 털고 군불 지피며 ‘사서 고생’하는 언님들
소수이긴 하지만, 내 희망을 앞서 실천한 서구의 환경운동가와 수도자들이 있다. 2005년 아마존의 벌목꾼들로부터 농민들을 지켜오던 노트르담 수녀회의 도로시 스탱 수녀가 아마존 파괴자들이 보낸 살인 청부 업자들에 의해 총을 맞고 숨졌다. 아마존을 지키기 위해 반평생을 수많은 살해 위협 속에서도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아마존의 천사’는 그렇게 아마존과 하나가 되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나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가난한 수도자들의 탁발 행렬이 이어졌던 거리를 삼소회 수도자들이 걷고 있었다. 스스로 걸인이 되고, 스스로 동식물의 친구가 되었던 이들이 걷던 길이었다.
나는 그 길에서 우리나라에 왔던 프란치스코와 수많은 클라라들을 생각했다. 나는 얼마 전, ‘동방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 떠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의 삶을 따르는 이들이 사는 경기도 벽제의 동광원 분원을 찾았다. 이현필 선생은 전라도 무등산 일대에서 폐병 환자와 고아들을 돌보면서, 자신은 거의 먹지도 입지도 않은 채 눈길을 맨발로 걸으며 고행의 삶을 살다가 벽제 분원에서 1963년에 별세했다. 동광원에선 수녀라는 말 대신 순우리말 언니의 높임말인 언님으로 부른다. 내가 갔을 때 그 공동체 원장이기도 한 박공순 언님은 홀태에 몇 단도 안 되는 벼를 훑고 있었다. 논에서 바로 벼를 탈곡하는 세상에, 농업박물관에서나 찾아봄직한 홀태를 그는 아직도 쓰고 있었다.
수도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언님들은 겨우살이용 나뭇단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찬 부엌에서 땔감으로 군불을 지피며 살고 있었다. 40년 전 그곳에 정착한 뒤 버려진 땅 4천여 평을 개간해 농사지으며 농약 한 번 써본 적없이 사서 고생을 해온 이들이었다. 편리와 성공만을 좇는 세상에 언님들이야말로 바보 중 바보였다.
‘네 것도 내 것’ 하는 세상에 ‘마음 속 천국’ 지은 수도자들
공순 할머니는 “숨쉬는 것이 기도지요.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시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남의 것을 송두리째 빼앗은 채 면피성 동정을 베푸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 가난한 데 처하면서도 자족하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며, 공기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하는 언님들을 보며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겄소.”
끊임없이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많이 거느리고만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든 지옥을 공순 할머니는 오래전에 벗어나 이미 천국에 있었다. 그는 그보다 수천 배 많이 가진 부자보다, 엄청난 신자를 거느린 어느 종교인보다 여유가 있었고, 평안했고, 행복했다. 그에겐 더 이상 갖고 싶은 것도, 확장할 땅도 없었다. 이미 하늘나라가 그 안에 있었기에.
삼소회원들도 욕망의 넓은 문을 두고 가난의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교화 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도 한 달에 용금 수십만원으로 살아가지만, 늘 깔끔하고 아름다운 삶을 유지하는 교무님들, 한 달에 몇십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수녀님들, 자신은 검약하기 이를 데 없이 살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손은 크기만 한 스님들…….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몫, 다른 나라의 몫, 자연의 몫을 빼앗아 내 배만 채우려는 세상에 아직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수도자들이 우산을 쓰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걷던 담장 밑을 걷고 있었다. 인간을 향해 흐르는 슬픔과 기쁨의 내 눈물이 아시시의 하늘에서 희망이란 이름의 꽃비로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인간이 희망이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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