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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자연 파괴하고 쌓은 부, ‘하느님 은총’으로 

등록 2009-12-25 16:27

“땅을 정복하라” 입맛 맞게 해석해 탐욕 정당화

‘무소유의 삶’ 강조한 예수님 말씀은 ‘행위’ 안해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장미의 정원엔 ‘구비오의 늑대상’이 서있다.

프란치스코가 쓰다듬고 있는 그 늑대는 인근 산악 지방인 구비오에 살았다고 한다. 그 늑대는 원래 사납기 그지없었다. 마을에 나타나 어린아이들을 물어죽여 온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트린 야생 늑대였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그 늑대를 찾아나섰다. 드디어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으르렁대며 살기 등등하게 프란치스코에게 대항했다. 그 때 프란치스코가 늑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늑대가 개가 되는 순간, 적 아닌 친구로 받아들인 그 때

 

“내게로 오너라, 늑대 형제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을 명령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늑대는 돌진을 멈추고 순한 양처럼 프란치스코의 발밑에 누웠다. 프란치스코가 늑대에게 말했다.

 

“늑대 형제여, 너는 이 지방에서 큰 해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 동네 전체가 너의 적이다. 하지만 늑대 형제여, 너와 그들 사이가 평화롭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너로 인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프란치스코가 늑대에게 이제부터 친구가 될 것을 청하자 늑대는 꼬리를 흔들어 답했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늑대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했고, 늑대는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사람을 물어 죽였던 늑대조차 ‘적’으로 규정해 응징하거나 우리에 가두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였다. 프란치스코가 친구로 받아들인 것은 늑대만이 아니었다. 모든 자연이 바로 친구이자 하느님의 화현이었다.

“오, 나의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과 더불어 찬양 받으소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자연을 찬미했다. 그는 늑대와 새들, 그리고 꽃들과 대화를 나눴다.

 

프란치스코가 언젠가 이곳을 산책하다가 아몬드 나무에게 다가가 “아몬드 나무여, 하느님에 대해 말해다오”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추운 겨울에 아몬드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장미의 정원’ 입구 쪽 벽의 조그만 프란치스코 상 옆엔 하얀 비둘기 한 쌍이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뒤 지금까지 한 쌍 중 한쪽이 숨을 거두면 다른 비둘기가 찾아와 짝을 채우면서 끊임없이 한 쌍의 비둘기가 프란치스코 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인과 비둘기와 우정은 1000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선민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약속을 예수님께서 인류 전체로 확대했다면, 인간에게만 국한된 ‘하느님의 축복’을 대자연으로 넓힌 프란치스코 성인은 대자연의 구원자라고.

 

믿음이 클 수록 더 많이 정복 할 수 있다 믿는 사람들

 

나는 프란치스코의 그 아름다운 삶을 되새기면서, 그런데 왜 그리스도교가 이끌다시피 한 서구 사회가 인류와 자연의 조화를 외면하고, 오히려 야생 늑대보다 더 늑대 같은 정복욕과 공격성으로 이 자연을 파괴한 것일까를 생각했다.

 

서구의 역사는 자연 정복과 파괴의 역사였다. 자연이야 어찌되든 상관 없이 자신들이 이룬 영화만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창세기 1장 26~29절)

 

성경의 많은 문구 가운데, 탐욕을 가진 자들은 이를 정당화시킬 문구를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7장 12~16절)

 

근시안적인 구약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별의 공존공영을 위해 무소유와 가난의 삶을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탐욕자들과 정복자들의 ‘구미’에 과연 맞았을까. 예수님은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갈수록 ‘행위’는 숨고 ‘믿음’만 강조된다. 마치 행위와 믿음이 전혀 별개인 것처럼.  마치 믿음이 클수록  많이 정복하고 많이 파괴할 수 있다는 듯이.

 

지구 멸망 현실화되면 다른 별 찾아 나설까 

 

이젠 지구의 평화를 더 많이 해치고 더 많이 오염시킨 이들이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를 자처하고 나서고 있다. 얼마 전 영국의 한 신문이 국제 환경 단체 그린피스의 최신 보고서를 인용해 중국의 환경 파괴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목재 소비국으로 부상한 열대우림 파괴국이며, 거의 미국만큼이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또 2031년 중국의 국민소득이 현재 미국 수준에 달한다면, 현재 세계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3분의 2를 소비하고, 하루 세계 석유 소비량 8,400만 배럴보다 많은 9,900만 배럴을 중국 한 나라가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중국이 그런 소비로 나아간다면 인류는 참담한 문명 붕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또 미국 환경보호국장은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대기오염이 미국에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산업화와 사막화,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우리나라는 매년 봄이면 체감하고 있다. 황사에 숨막혀하면서 환경 문제가 ‘자타불이自他不二(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님)’임을 폐부 깊숙이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중국의 사막화가 가속화하면 우리나라는 사람이 숨쉬기 어려운 폐허로 변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의 환경 문제는 우리에게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문제를 미국이 제기하는 것이 난센스라고 느꼈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선진국들이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의무적으로 1990년 대비 5.2퍼센트 줄이기로 합의한 교토의정서를 채택했는데, 2001년 이 국제 협약 서명을 일방적으로 철회해버렸던 그 미국이기에.

 

19세기 이래 세계 인구는 여섯배로 증가한데 비해 에너지 수요는 80배나 증가했다.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세계 인구의 20퍼센트도 안 되는 선진국 사람들이 세계 에너지의 80퍼센트를 쓰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화석에너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처럼 에너지를 쓴다면 앞으로 40년 뒤 석유가 바닥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오염의 두 주축 미국과 중국은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국 총회에서 시차야 있을지 모르지만 지구멸망을 그린 영화 <2012>가 공상으로 끝나지않을지 모른다는 지구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도 지구의 자원이 바닥이 나 저 머나먼 별나라로 자원을 찾아 떠나 프란체스코와 구비오처럼 인간과 동물과 자연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별나라까지 파괴하는 영화 <아바타>가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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