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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그 많은 선교사들은 예수의 ‘좁은 문’ 몰랐을까

등록 2009-11-04 15:23

이방인 살해·파괴…전도의 열정과 신화로 미화

세계 2번째인 한국 선교사에 대한 뒷말에 씁쓸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선교사들로 인한 여러 얘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고 있다.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가히 침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지배자로 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식민과 피압박의 설움을 수없이 받은 우리가 미국인이나 유럽인들보다 더 제3세계 사람들을 멸시하고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수없이 짓밟히고 신음한 고난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야말로 서양과는 다른 방식으로 약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진정한 벗이자 봉사자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가.

 

‘피지배자의 역사’ 갖고도 제3세계 사람 더 멸시

 

언젠가 인디언 수우 족 추장이 백인들 앞에서 행한 연설을 읽었을 때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너무도 선하고 순결한 그 영혼이 깊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당신들은 우리 부족이 가진 대지의 한 조각 속으로 낯선 자처럼 걸어 들어왔다. 우리는 당신들을 형제처럼 맞이했다. 당신들이 처음 왔을 때 우리는 숫자가 많았고 당신들은 적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당신들이 우리에 대해 듣고 있는 소문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살인자와 도둑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땅이 더 있었다면 기꺼이 당신들에게 주었겠지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땅은 아무것도 없다. 우린 당신들에게 내쫓겨 섬처럼 작은 땅에서 죄수처럼 살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 사람 아무에게나 물어보라. 우리는 당신들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당신들도 대지의 아들이고, 우리 역시 대지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상해라. 당신들은 그렇지 않다. 우린 당신들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당신들은 지키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되는 일이지 당신들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 당신들의 깨달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깨달음이다.

 

부라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저세상에 그것을 갖고 갈 수가 없다. 우린 부가 아니라 사랑과 이해를 원한다.

 

당신들의 목사 한 사람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산은 다음 세상으로 갈 때 갖고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해라. 그 목사를 포함해 문명인들 모두가 이 세상의 부를 우리에게서 강탈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오늘 오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말한 것에 대해 당신들이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곧 이 대지를 떠날 것이지만 대지 그 자체는 영원하다. 우리가 그 영원함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뒤쫓던 박해자 구한 윌렘스, 결국엔 화형

 

예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시대 보복의 법과는 반대로 사랑의 법을 가르쳤지만 그로부터 2000년 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관용을 베푼 이방인들까지 처절히 살해하고 파괴했다. 지배자의 역사는 이를 오히려 종교적 열정과 전도의 신화로 미화하곤 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가 이렇게 통탄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을. 탐욕과 폭력의 넓은 문을 두고,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하는’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한 사람마저,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육화된 사람들이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원주민들의 땅에 은인을 원수처럼 배반한 그리스도인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젠가 재세례파 선교사들이 남미 에콰도르로 원시 부족 선교를 위해 떠났다. 이들은 경비행기에서 선물을 먼저 떨어뜨린 뒤 원시 부족의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은 머지않아 강가에서 창에 찔려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로부터 40년 뒤 죽은 선교사의 아들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부족들은 이번엔 창 대신 호기심으로 그를 맞았다. 그들은 40년 전 죽은 선교사들 옆에 사냥총이 있었는데 왜 그들이 총으로 자신들을 방어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선교사의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을 살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겠다고 자청했다.

 

세 나라가 동시에 보이는 작은 열쇠구멍, 예수의 ‘좁은문’?

 

나는 또 한 명의 재세례파인 더크 윌렘스가 자신을 박해하던 자를 물에서 건져주는 장면을 그린 삽화를 잊을 수 없다.

 

1569년 네덜란드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윌렘스는 어느 날 감옥을 탈출했다. 그러자 박해자들이 그를 쫓았다. 윌렘스는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다른 박해자들은 아직 강둑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한 박해자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강엔 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다. 그가 강을 건넌 뒤 얼음이 깨져 그를 뒤쫓던 박해자가 물에 빠졌다. 박해자는 수영을 하지 못했다.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신이 쫓던 윌렘스를 향해 소리쳤다. “살려주시오”라고. 윌렘스는 그 소리를 듣고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박해자에게 달려갔다. 윌렘스가 박해자를 구하자, 강둑에서 다른 박해자들이 그를 체포하라고 소리쳤다. 결국 윌렘스는 체포돼 얼마 뒤 산 채로 불태워졌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며, ‘왜 윌렘스는 도망가지 않고 돌아가 박해자를 구했을까’ 가슴으로 묻고 또 물었다. 박해자들과 윌렘스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들이었다. 한쪽은 자신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또 한쪽은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조차 살리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윌렘스를 따르려 하지 않지만, 과연 어떤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인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안셀모 수도원대학 앞이었다. 그 수도원 앞에 몰타 기사국의 수도원이 있었다. 몰타 기사국은 인구 80명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국가다. 돌로 지어진 그 수도원 대문에 뚫린 열쇠 구멍은 로마의 명물이다. 그 조그만 열쇠 구멍 속으로 세 나라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녀님과 교무님과 스님 들도 앞 다투어 열쇠 구멍으로 세 나라를 동시에 보았다. 그 작은 구멍 속엔 이탈리아란 대국과 인구 1천 명의 바티칸 시국, 인구 80명의 몰타 시국이 ‘함께’ 있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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