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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수도복 패션, 로마의 거리 한눈에 사로잡다

등록 2009-09-30 15:33

<17> 마지막 여정, 로마 입성

백발의 ‘10대 소녀’들 ‘로마의 휴일’에 마음 들떠

말괄량이 수녀님, 그 많던 ‘끼’ 어디에 숨겼을까

 

 

긴 순례동안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하자 마지막 여정인 이곳에서만큼은 ‘로마의 휴일’을 즐길 태세였다. 여성수도자들의 눈빛이 10대 소녀들처럼 빛났다.

 

로마에 오기 훨씬 전부터 ‘트레비 분수에서 아이스크림을 쏘라’거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져야 한다’고 수녀님과 교무님, 스님 들이 소곤대는 얘기를 자주 들었던 터라 막연하게나마 그들이 설레며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만 하고 있었다. 모처럼 시내로 진출한 이들은 “야, 말로만 듣던 로마”라며 신나했다.

 

카타리나 수녀 엄격한 규칙속에서 ‘경고, 경고’

 

빡빡 민 머리에 회색 옷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승복 차림으로 로마 시내를 걷는 스님들의 모습이 ‘패션의 도시’라는 로마에서도 눈길을 휘어잡았다. 정성 들여 해 입은 선재 스님의 승복 패션을 보면 로마의 패션 디자이너들도 울고 갈 것만 같았다. 또 머리를 말아올려 비녀를 꽂고 청순한 치마 저고리를 입은 교무님의 패션은 어떠한가. 한국의 여러 수도자들이 어울린 패션이 로마 거리를 자연스런 수도복 패션쇼장으로 만들었다. 지나는 행인들도 신기한 표정이다. 저런 옷은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입는 옷이냐는 듯이.

 

나보나 광장 가까이 가자 카타리나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카타리나 성녀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카타리나 성녀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어느 순간 지혜가 열려 학자들의 수호 성인이 됐다고 한다. 카타리나 수녀님의 세례명이 이 성녀에게서 딴 것인데 교수님인 수녀님에게 딱 어울리는 수호 성인이 아닐 수 없었다.

 

카타리나 성당에 들어가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순전히 카타리나 수녀님을 위해 모두 카타리나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카타리나 수녀님이 성녀가 된다면, 세상의 말괄량이들에게 큰 희망이 될 텐데’라고 생각하니 혼자 웃음이 나왔다.

 

30여 년 전 카타리나 수녀님이 수도회에 입회할 때까지도 수도회의 규칙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수도회 대문 밖을 나가 성당까지 갈 때도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눈은 아래로 지그시 내리고 앞만 보고 걸어야 했다. 설사 아는 사람이 있어도 함부로 아는 체를 해서도 안 됐다. 밖에서 아는 남자를 만나 꼭 대화를 해야 한다면 수도원으로 데려와 얘기를 해야 했다. 수도원 안에서 노래를 불러서도,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됐다. 수도회에 입회하기 불과 몇 달 전 서강대 졸업여행 때만 해도 서울에서 설악산까지 버스 안에서 레퍼토리가 한 번도 끊이지 않게 노래하면서 갈 정도로 끼 많았던 카타리나 수녀님이 어떻게 수도원 생활을 견뎌냈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도 모른 체하고 지나간다는 것은 적어도 카타리나 수녀님에겐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그러니 윗분들의 경고는 늘 그의 몫이었다. 그러면 카타리나 수녀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좋은 걸 어떡해요?”

 

입회 소식 듣고 ‘식음전폐’ 청년에게 “기도할게요”

 

그렇게 사람 좋아하는 그가 어떻게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들을 다 물리치고 수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또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천성이 명랑하기 그지없는 카타리나 수녀님은 늘 웃는 얼굴이었다. 누가 웃는 얼굴을 싫어하랴.

 

대학 시절 그 눈부신 미소에 반한 남성들이 왜 없었을까. 그가 수도회에 들어가버리자 모교인 서강대 남학생들이 “꼭 찍어놓은 여자들은 수녀가 된단 말이야”라고 한탄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서강대를 졸업하고 그가 성가수녀회에 입회할 때 실은 목숨을 걸고 항전한 남자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농촌 봉사활동을 갔다가 만난 남학생이 카타리나 수녀님을 짝사랑했던 모양이다. 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시험에만 합격하면 결혼할 생각으로 불철주야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짝사랑하던 여인이 수녀가 된다는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렸다. 남자의 어머니가 마침내 그 사연을 알고선 카타리나 수녀님을 찾아왔다. “내 아들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내 아들 살려내라”고 했다. 고민이 된 수녀님은 어른 수녀님들과 상의했다. 어른 수녀님은 “거기에 속아넘어가선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예상 문제지의 정답 그대로였다.

 

단식 투쟁으로 카타리나 수녀님을 굴복시킬 수 없자, 그 남자는 드디어 광화문 성가수녀회로 수녀님을 찾아왔다. 그래서 둘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계속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아요.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지 않나요?”

 

그 남자를 돌려보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 카타리나 수녀님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어차피 남녀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던데?”

 

내게 묻는 수녀님의 베일 밖으로 드러난 흰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36년 전 청춘은 이미 전설이 되었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그래도 마음속에서 묻고 있었다.

 

‘수녀님, 지금도 그를 위해 기도하시나요?’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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