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세음보살, 나의 성모님 (1)
삼계 스승인 스님도 어머니에겐 그저 애같아 걱정
넉넉한 사랑과 자비로 품는 그 마음 성모와 다르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숨을 거둔 그 자리에서 가장 애통해했을 사람은 성모 마리아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자식이 눈 앞에서 처절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 가슴은 찢어지고 또 찢어졌을 게 분명했다.
예수님의 어머니, 아흐마드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 자식이 품 안에 있을 때 뿐 아니라 품을 떠난 이후에도 결코 마음으로는 자식을 보내지 못하고 끝내 껴안고 살아가는 그런 어머니들이었다.
“내 얼굴이 무기인데 누가 채갈라구”
부모를 떠나 출가의 길을 택한 수도자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 십자가의 길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을 때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 때 진명 스님이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출가한 몸이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속가 보살님에게 저는 아직도 어린아이에 불과한 모양이에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보다는 다른 여성불자들을 부르듯이 ‘보살님’이라고 하는 호칭이 어쩐지 더욱 더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래도 스님들이 속가 어머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조금은 다행스러워 보이긴 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일단 ‘출가’한 수도자들에게 속가는 꿈속의 집만큼 아득하기만 했다. 일단 출가한 수도자는 되도록 속가와 발을 끊고 살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어머니를 다른 호칭으로 부른다고 할지라도 어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다를 수 있을까.
“지리산 자락에 살고 계신 보살님에게 삼소회 순례를 위해 오랫동안 외국을 돌아다닌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차 조심하고, 밤엔 절대 혼자 다니지 마라고.
그래서 진명 스님이 그랬단다.
“보살님은, 내 얼굴 자체가 무기인데 누가 밤에 채가기나 한다고. 착각도 잘하십니다.”
진명 스님의 고해성사 아닌 고해성사에 차 안에서 반짝이는 눈물 속에서도 폭소가 터졌다.
마리아 수녀님은 어머니가 수녀님들도 아니고 스님들, 교무님들과 같이 가니 책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말했다. 출가자의 부모라고 다르랴. 스님이란 스승님의 줄임말이다. 삼계三界의 스승이라는 스님이지만, 부모님에겐 여전히 어디다 두어도 안심이 안 되는 자식일 뿐인 것을. 그런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수도자들의 눈이 하나 둘씩 차창 밖으로 향했다. 아마도 멀리멀리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 얘기가 나올 때 그 고생하는 모습을 그릴 때처럼.
낳은 자식 일곱, 키운 자식은 여덟
나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례길을 나설 때 미처 인사도 못 드렸다가 순례 중에서야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다. 팔남매를 시집 장가보내고 고향집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는 그날 밤 홀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도 깜빡 잊어버렸던 큰아버지 기일이었던 것이다.
열여섯 살에 열 살 위였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을 때, 아버지는 세 살 난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바로 위에 형, 내겐 큰아버지가 결혼하자마자 큰어머니가 임신한 줄도 모른 상태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큰어머니는 딸을 낳자마자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마음 여린 아버지가 형님의 일점 혈육을 어떻게 버려둘 수 있느냐면서 총각의 몸으로 조카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여섯 살 새색시가 시집오자마자 애 엄마가 되었고, 어머니는 평생 그 누님을 딸로 키워 시집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낳은 자식은 일곱이지만, 그 누님을 합쳐 어머니가 키운 자식은 여덟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와서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큰아버지의 제사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 넘게 모시고 있었다. 큰아버지의 딸인 누님마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선친의 제사엔 오지 않아서, 어머니 혼자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지금은 누나와 동생들을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시아주버니의 제사를 혼자서 지내온 것은 형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그 큰방에서 제삿상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을 어머니가 차창 밖에 어른거렸다. 내겐 한결같은 어머니의 그 마음이 바로 종교였다.
아들 낳아오라고 아버지 등 떠밀어
아버지는 세 살 난 조카를 키우고 있었지만 집엔 겉보리 한 됫박도 없이 가난한 데다, 일제 시대 징용을 피해 도망가 탄광에서 일하다 수은 중독이 되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서당 훈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그런 사정을 모른 채, 사람 됨됨이 하나만 보고 아버지에게 꽃처럼 고왔던 어머니를 시집보냈다.
100여 가구가 살던 우리 시골 마을엔 큰 샘물이 있었다. 너럭바위 속에서 늘 맑은 물이 콸콸콸 나와서 한눈에도 영험이 있어 보였다. 옛날부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새벽에 가장 처음 물을 떠 3년 간 끊이지 않고 그 물을 먹으면 아무리 죽을 병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와서 3년 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0여 가구 마을 사람 중 맨 처음으로 꼭두 새벽마다 그 물을 떠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그 덕에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가 남편에게 들인 ‘정성’이었다.
우리나라도 이젠 딸을 낳아야 비행기를 타고, 아들 낳아봐야 별 볼일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지만, 딸이 사람 대접 받은 지가 불과 30년이나 됐을까. 1950~60년대까지 우리 집안만 해도 ‘자식’이란 대를 이을 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시집와서부터 키운 조카딸 외에도 내리 딸만 넷을 낳은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내 팔자엔 아들이 없는 모양이니 다른 여자한테서 아들을 낳아오라”고 해서 결국 아버지가 여자를 하나 얻긴 얻었다고 한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조차 어머니에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미안해 아버지가 다른 여인 집에 가지 않으면 어머니가 쌀가마를 지워주면서 제발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니 말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 꿈을 완전히 접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마을 강 건너 앞산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험로를 한참이나 올라간 곳에 조그만 절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점지해주십사 하고 불공을 드리러 가며, 쌀을 머리에 이고 한 번도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내려놓으면 부정을 탈까봐, 너무 힘이 들면 머리에 인 채 나무에 살짝 기댔다가 다시 올라가서 밤새 불공을 드렸다. 그 정성 덕인지 내가 태어나 아버님이 다른 여인 집에 발길을 끊어 우리 가계가 복잡해질 일은 없어졌다. 그것이 어머니가 부처님에게 올리는 ‘정성’이었다.
걸인이나 행상들의 아지트가 된 우리집
그런 정성도 정성이지만, 손을 놀리는 어머니의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20여 명의 삯꾼을 사서 들판에서 함께 일하다 새참 때가 되면 바람처럼 논두렁을 가로질러 집으로 갔다가는 잠시 뒤 어느새 20여 명이 먹을 음식을 가져오곤 했다. 추수 때가 되면 들판에서 우리 집 머슴들과 삵꾼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혼자 남아 밤늦도록 이삭을 줍곤 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이삭을 줍느라 온 논바닥을 뒤지는 것을 보고는 어린 눈에도 저것을 건지자고 저 고생을 하나 싶어 한심스럽기만 했다. 그것이 어머니가 한 톨의 쌀에 기울이는 ‘정성’이었다.
그렇게 쌀 한 톨도 아까워하던 어머니였지만 늘 들판에서 식사를 할 때면 밥 한 술씩을 떠 논두렁에 놓으며 ‘고수레’를 해 뭇 생명들과 함께 나누고, 집에 온 행상이나 걸인은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우리 집은 큰 동네에서도 가장 앞쪽에 있는 데다 가장 큰 집이었기에 걸인과 행상들이 아예 아지트로 여기곤 했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먹는 상에 그들을 함께 앉혔다. 그래서 몇 년 동안 한 번도 이를 닦지 않은 듯한 걸인이 입으로 쪽쪽 빤 숟가락이 찌개 그릇에 들어갈 때면, 비위가 약한 나는 밥숟가락을 놓아버리곤 했다. 왜 거지들에게 밥을 주느냐고 푸념을 하면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술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며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설움을 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가엾은 이들에게 들이는 ‘정성’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홀로 된 것은 마흔여덟 살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자비로웠고 유머가 넘쳤기에 백이면 백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나이 열다섯 살에 뇌출혈로 눈을 감자 마을 사람들과 일가 친척들과 아버지의 지인 등 500여 명이 우리 집 방과 마루와 마당과 뒷밭까지 가득 메워 함께 통곡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이후 매년 제삿날이면 그날 함께 울던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지금까지도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
뱀술 먹고 쓰러지면서도 선물한 사람의 마음 걱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칠남매를 떠안은 어머니가 한 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사람은 그 상처를 원망으로 투사하는 게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어머니에겐 그런 심리적 인과도 맞지 않았다.
언젠가 골병이 든 어머니를 위해 한 친척이 병에 뱀술을 담아왔다. 그런데 뱀술을 담아온 그 소주병이 농약병으로 쓰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뱀술을 마시고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의사들도 고개를 살래살래 저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어머니는 당신이 죽는 건 아무 걱정도 없이, 이대로 죽으면 뱀술을 준 사람이 화를 입지나 않을지 오직 그 걱정뿐이었다. 그것이 은혜를 입은 상대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우리 마을에 ‘귀염이’라는 천덕꾸러기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빨래는커녕 밥도 못 끓여먹고 옷에 오줌똥을 쌌지만 누구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그분을 몰래 몰래 돌보신 분도 어머니였다. 누나들이 이를 알고 평생 그 모진 고생을 했으면 이제 좀 자신만 생각하고 살지, 왜 남의 똥빨래 수발까지 드느냐고 성화를 부리면, “안 한다”면서도 또 몰래 그 집에 가서 수발을 들곤 했다. 그것이 ‘이웃’에게 들인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무슨 위인이나 되는 듯하지만, 내 어머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데다 평생 시골에서만 살아왔고 신문 한 장 볼 줄도 모르는 촌로일 뿐이다. 무슨 업적을 남긴 위인전의 여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촌로인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모습 안에서 관세음보살님과 성모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자비와 사랑을 찾을 것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http://img.hani.co.kr/imgdb/original/2009/0713/well_2009071315481.jpg)
![](http://img.hani.co.kr/imgdb/original/2009/0713/well_2009071315482.jpg)
![](http://img.hani.co.kr/imgdb/original/2009/0713/well_2009071315483.jpg)
![](http://img.hani.co.kr/imgdb/original/2009/0713/well_2009071315484.jpg)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