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수도자] ⑧ 끝없는 선악 놀음 현장
아브라함 후손들이 올리는 끊임 없는 ‘산제물’
인간적임을 넘은 예수의 순명에 터진 속울음
겟세마네 동산의 나무가 울고 있었다. 자신의 손과 발에 다가오는 못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생명처럼. 나무 중에서도 가장 단단하다는 올리브 나무였다. 그 단단함 속에서 울부짖음이 솟구치고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서자마자 우는 듯한 형상의 올리브 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성당 옆 늙은 올리브 나무는 아마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모습을 보고 들었을 만큼 2000년도 넘을 것이라고 했다.
황금사원은 새천년 희망을 핏빛으로 바꿔버린 비극 잊은 듯
겟세마네 건너편 언덕엔 무슬림과 유대인의 성전이 한데 집결해 있는 동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언덕 한가운데에는 황금빛 사원이 우뚝 서 있었다. 새천년의 희망을 암울한 핏빛으로바꿔버린 그 비극을 망각한 듯 황금빛 사원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황금사원은 천연의 바위 위에 세워진 성전이다. 그 바위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바로 그 자리다.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무슬림이 모두 시조로 받들고 있는 인물이다. 훗날 솔로몬 왕이 이곳에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 신전은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515년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유대인에 의해 재건되었고, 이후 로마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로마에 기독교가 공인된 뒤 교회가 세워졌다가 7세기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무슬림들이 이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다. 그래서 무슬림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그런데 무슬림이 관리하는 이 성전을 지난 2000년 이스라엘의 리쿠르드 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이 방문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발끈했다. 마치 이 성전은 우리의 것이라고 선포하는 듯한 샤론의 모습에 화가 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항의의 뜻으로 바로 옆 ‘통곡의 벽’ 아래서 기도하던 유대인들에게 돌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힘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에 맞섰다. 이로 인해 양쪽에서 7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열두 살 난 어린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 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하는 장면이 전 세계 텔레비전에 방영돼 충격을 준 것도 이 때였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 강 서쪽 네블루스에 있는 유대교 성지인 요셉의 묘를 파괴하고 유대 경전을 찢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즉각 이슬람 사원들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의 중재 노력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양쪽의 감정은 악화돼 테러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악은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다
황금사원 쪽에서 아들을 산제사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칼이 번득이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이었을까. 나는 교회 장로님이 원장으로 있는 마을 탁아소의 주일학교에 다녔다. 어린 양처럼 꼬박꼬박 주일학교에 나가 성경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손을 묶어놓고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든 그림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하느님은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만류했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껏 이 일대에서 산 제물을 계속 올리고 있지 않은가. 다만 자신의 자식도, 자신도 아닌 이방 종교인들을.
내 안의 폭력과 살심이 가장 정당화되고 양심의 가책이 가장 덜어지는 순간은 상대방이 악으로 규정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악은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다. 자신은 선이 되고 타인은 악으로 규정하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악은 이교도다. 상대가 악이 되면, 그때부터 상대는 악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악’이란 무엇일까. ‘살아 있는’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live’를 거꾸로 읽으면 ‘evil’, 즉 ‘악’이 된다. ‘살아 있게’ 하지 않고 ‘죽이는 것’. 나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선악 놀음의 현장에서, 진짜 악이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생명을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잔을 거둬 주십시오” 기도하다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황금사원을 둘러싸고 상대를 ‘evil’화하는 마음이 ‘live(살아 있게)’하는 마음으로 변화되길 기원하는 사이, 순례단은 모두 겟세마네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교회 안은 어두컴컴했다. 어두운 한가운데 예수님이 바위 위에 외롭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올리브 나무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회 앞 천연의 바위 위에 그려진 대형 그림은 그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날 기도했던 바로 그 암석 위에 그린 그림이었다.
유럽에서 온 듯한 순례단이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림 속의 예수님을 바라본 채 멈추었다. 예수님을 바라보던 십대 후반의 한 소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삼켰다. 어두운 그림 아래서 스님들과 교무님들도 수녀님들과 함께 북받쳐오르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그 기도가 모성을 자극한 것일까. 아니면 그 연약함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자신의 원을 접은 예수님의 그 순명에 여성 수도자의 속울음이 터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할 때 흘린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는 그 애절함이 전율로 다가온 때문이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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