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자의 여성수도자 삼소회 순례] ①
삼소회 16명, 세계 5개국 18박19일 성지 순례
‘생소한 타종교 체험’ 설렘 반 두려움 반 발길
“내가 예뻐 보이려고 수녀 됐나요?”
나는 카타리나 수녀님을 볼 때마다 젊은시절 어른 수녀님과 신부님들에게 대들었을 옛적의 수녀님을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회갑을 지난 지금도 수녀님의 본모습은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으니까.
수녀님은 10여 년 전 수도원장을 지내고, 회갑을 훨씬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마치 10대 소녀 같다. 몸은 연약하기만 해 보이기만 하지만 수녀님은 여성수도자에게 가해지는 터부와 과감히 맛서는 용기도 있었던 모양이다.
대한성공회의 유일한 여성 수도원인 성가수녀회에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머리에 베일만 쓰는 게 아니라 턱받이처럼 생긴 윔플까지 써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다. 세기의 영화배우인 오드리 헵번이 <수녀 이야기>에서 그런 윔플을 쓰고 나와 대히트를 쳤기에, 평소엔 답답하게만 보이던 베일과 윔플이 상당히 멋져 보이기도 한 때가 있었다.
“예뻐 보이려고 수녀 됐나요?” 톡 쏘자 어른 신부님 수녀님들 손 들어
카타리나 수녀
카타리나 수녀님은 천성적으로 말괄량이여서 베일과 윔플까지 쓰고 수녀 생활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수녀님은 그 윔플을 벗고 숨 좀 제대로 쉬자고 했단다. 그러자 수녀들이 얼굴을 1센티미터라도 더 드러내는 것을 지극히 못마땅해 하던 어른 신부님과 어른 수녀님들이 “오드리 헵번 봐라. 얼마나 예쁘냐. 윔플을 쓰면 얼마나 예쁜데 그걸 벗으려고 그래”라고 했다. 그 때 카타리나 수녀님이 그랬단다.
“내가 예뻐 보이려고 수녀 됐나요?”
수녀님의 반격에 윗분들도 할 말이 없어 그 제한을 완화해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나도 카타리나 수녀님의 얼굴을 좀더 잘 뵈올 수 있는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경 잘못 외는 도반 위해 유행가 가사를 염불로 바꿔 부르게
카타리나 수녀님 못지않게 또 못말리는 구석이 있는 분이 진명 스님이었다.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차 한 잔의 선율’이란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명성을 떨친 분이었다.
그런 끼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20여년 전 행자 때부터 이미 그 싹을 보인 것이다. 진명 스님이 막 출가해 행자로 있을 때였단다. 깊은 산사에 목욕탕이 있을 리 없고 목욕물을 데우기도 쉽지 않아 행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정해진 날에만 큰절에 내려가서 목욕을 했다. 아직 정식 사미니계도 받지 못한 행자로 부엌에서 훈련병처럼 고생할 때니 매일 온몸에 땀이 흥건히 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명 스님은 행자 생활을 함께 하던 도반과 큰절에 목욕하러 내려갔다. 행자 시절에는 일하는 틈틈이 반야심경이나 초발심자경문 등 기본적인 경이나 염불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도반은 도무지 염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명 스님이 도반을 위해 고안해낸 것이 유행가 가사를 염불로 바꿔 부르며 외우는 것이었다. 어른 스님한테서 꾸중을 밥 먹듯 듣던 도반은 그 덕분에 날로 염불 실력이 향상되어갔다.
어느 날 두 행자는 보름 만에 목욕을 하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산을 올랐다. 큰절에서 올라오는 길은 호젓하기 그지없었다. 신이 난 두 행자는 다시 염불 외우기에 들어갔다. 유행가 가사에 박자를 맞추다 보니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스텝이 맞춰졌다. 도반이 신명나게 스텝을 밟자 신이 난 진명 스님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쑤시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트위스트 춤을 개조한 일명 다이아몬드 춤이었다. 두 행자는 유행가인지 염불인지 모를 노래를 부르며, 다이아몬드 춤을 신나게 추면서 산길을 올랐다. 이제 나무와 계곡물도 신이 나 함께 춤을 추었다.
트위스트 개조한 ‘다이아몬드 춤’ 추며 산길 오르다 들켜
진명 스님(오른쪽)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춤에만 열중했던 두 행자는 처음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는 박장대소가 아닌가. 놀란 두 행자가 산 중턱을 바라보니, 바위 위에서 비구니 스님 서넛이 자기들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두 행자는 너무나 놀라 기절할 뻔했다. 행자 주제에 길에서 춤까지 췄으니 쫓겨나도 열 번은 더 쫓겨날 일이었다.
이제 나 죽었소 하고 절에 도착해 죽을 채비를 하고 있는데, 스님들이 어린 행자들의 행동을 귀엽게 보았던지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춤을 추는 행자’들의 전설이 온 산중에 퍼져버렸다. 그 후로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는 바람에 더욱 조신하게 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조심하려니 숨겨진 끼를 무려 20여년 동안 펼치지 못한 채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런 세월을 보내기 어언 20여년 만에, 그의 숨은 끼를 발견한 피디에 의해 방송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젊은 비구니가 그 험하다는 서울에 사는 것도 불안하게 여기는 산사의 노스님들은 전국 사방팔방에 목소리까지 내보내는 그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곤 했다. 이에도 아랑 곳 없이 진명 스님은 고향 같은 산사에 갈 때도 바흐의 음악을 즐기며 가곤했다. 그러면 어머니 같은 노스님은“너 혼자 이곳까지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스님은 “바흐랑 같이 왔다”고 답한다. 그럴 때면 노스님은 “아니, 젊은 비구니가 바우놈하고 단둘이 온단 말이냐”라고 화들짝 놀라며 “그 바우란 놈 어디 있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신단다.
종교간 다툼과 대립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 위해 길 떠나
만만치않은 이런 분들 16명, 그것도 가톨릭과 성공회 수녀, 불교 비구니 스님, 원불교 여자 교무 등 다양한 종교의 여성수도자들 모임인 삼소회원들이 함께 18박19일의 세계 순례에 나선 것이다. 종교 간 다툼과 대립을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각 종교 성지와 테러 현장에서 직접 평화의 기도를 드리며 평화의 기운을 모으기 위해.
이들은 떠나기 전 함께 모여 기도를 올렸다.
‘저희 모두는 거룩한 마음으로 기원하나이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시대에 살면서 불교의 수행자로, 천주교와 성공회 수도자로, 원불교 교무로 출가의 길을 가고 있는 저희 삼소회 일동은 비록 종교의 문을 달리하였으나 함께 마음을 모아 종교 화합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세계 종교의 성지 순례를 하게 되었나이다.
테러도 반테러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저희들은 독선과 아집과 편견을 넘어, 종교의 울도 넘어 한국 여성 수도자의 이름으로 세계 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 모든 가르침이 평화임을 가슴에 거듭 새기며 실천하기를 기원하나이다.
저희들의 이 기도가 비록 미미한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세계 평화의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 전인류의 가슴을 적시고 일체 생명을 자비로, 사랑으로, 은혜로 감싸안기를 기원하오며 진정으로 이 시대의 모든 종교인들이 세계 평화를 꽃피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기를 기원하나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 성지를 순례하면서 저희들의 이 뜻이 전 인류의 가슴에 전하여지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도록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3인이 웃다’라는 뜻을 가진 삼소회의 유례
삼소회는 1988년 장애인올림픽을 앞두고 원불교 교무님과 불교 스님, 가톨릭과 성공회 수녀님들이 장애인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 여러 수도자들이 모여 우연히 경복궁 옆 법련사에 들렀을 때 절 내 불일서점의 현장 스님이 즉석에서 지어준 이름이 바로 삼소회三笑會였다. ‘3인이 웃다’라는 뜻을 가진 삼소회의 유래는 중국 동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산 동림사의 고승 혜원 스님은 일생 동안 호계 다리를 결코 넘지 않겠다는 규율을 정하고 수도에 전념했다. 산문 밖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 혜원 스님의 원칙이었다. 혜원 스님은 유교의 도연명, 도교의 육수정 등 다른 종교의 도인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쌓았다. 어느 날 도연명과 육수정이 동림사를 찾아왔다. 혜원 스님은 모처럼 그들과 즐겁게 회포를 풀었다. 스님은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도 도담道談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두 벗에게만 집중하다 발밑을 보니 이미 호계 다리를 넘어버리지 않았는가. 두 벗에 취해 37년 만에 경계선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이를 안 세 벗이 크게 웃었다는 데서 ‘호계삼소’라는 말이 나왔다.
장기 동행 첫경험에 설렘 반 두려움 반
그들은 마치 소풍을 앞두고 설렘 때문에 아침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아이들처럼 수도자들은 들떠 있었다. 그러나 설렘이 전부는 아니었다. 삼소회원들은 한 달에 한 차례씩 만나 함께 침묵 명상을 해왔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지내는 것은 첫 경험이었다. 누구나 익숙해지기 전의 경험은 두렵고 아프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금남의 구역에서 살아가는 여성 수도자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철저히 지켜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함께하는 순례’에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적당히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공간이 허용될 수 없었다. 부모 형제의 품조차 떠나 ‘나’를 투신한 출가자에게도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동승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성을 더 큰 대해에 던져야 하는 또 한번의 출가와 다름 없었다.
수도자들의 설레는 미소 속엔 알듯 모를 듯한 두려움이 언뜻 언뜻 묻어났다. 타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참여해야 할 너무나 생소한 타종교의 의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낯선 종교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겐 너무도 익숙한 믿음과 가치가 상대에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의 믿음에 온몸을 던진 수도자에게 그것은 믿기지 않는 충격이 될 게 분명했다. 우리나라에 이어 인도, 영국,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 5개국을 도는 여성수도자들의 공동 순례는 이렇게 두려움으로 시작됐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비채 펴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