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그대로 백척간두다. 2010년대 찾아온 황금기. 한국 여자배구는 그간 꿈꾸기 어려웠던 고지에 올랐다. 올림픽 4강-8강-4강. 우려와 어려움 속에서 일군 도쿄올림픽 4강 신화는 그중에서도 백미였다. 하지만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은 것일까. 황금세대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뒤 여자배구는 절체절명 위기에 놓였다. 최근 열린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성적은 2개 대회 연속 전패(24패). 오는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전망에도 먹구름이 꼈다.
위기 속에서도 대표팀 주장 박정아(30·페퍼저축은행)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17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여자배구 대표팀 공개훈련에서 만난 박정아는 오는 아시안게임에 대해 “메달을 따는 게 모두의 목표”라며 “목표가 있으면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다 같이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앞서 2014년 인천 대회 금메달 등 3번의 아시안게임에서 연속 메달을 딴 바 있다.
실제 이날 열린 대표팀 공개훈련은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경직되거나 일방적이지 않았고, 음악을 들으며 게임을 접목한 훈련 등을 통해 팀 조직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박정아는 주장으로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많이 들으려고 하는 편”이라며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말하기보다는 같이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이런 리더십에 잘 어울리는 훈련 분위기였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주장 박정아가 17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공개훈련에 앞서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드러운 성격처럼 보이지만, 사실 박정아의 내면은 누구 못지않게 단단하다. 박정아는 다른 선수보다도 국가대표에서 산전수전을 많이 겪었다. 특히 2016년 리우 대회 때는 8강에서 네덜란드에 패한 뒤 누리꾼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개인 인스타그램까지 닫아야 할 정도로 공격이 심했다. 배구계에선 “박정아 잘못이 아닌 한국배구 시스템 문제”라는 항변이 나왔지만, 국제대회 때면 터져 나오는 ‘애국심’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박정아는 이겨냈다. 오히려 박정아는 이후 이어진 국제대회에서 잇달아 태극마크를 달고 맹활약했다. 그렇게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했고, 김연경에게 쏟아졌던 부담을 짊어질 수 있는 에이스로 거듭났다. 이런 활약은 리그에서도 이어졌고, 박정아는 2017∼2018시즌 한국도로공사를 여자부 챔피언 자리에 올리며 생애 첫 챔프전 최우수선수(MVP)도 받았다. 김연경의 뒤를 이어 대표팀 주장에 선임됐을 때는 “주장이 됐지만 부담감을 나눠 가지면 괜찮을 거라 본다. 책임감도 선수들과 나눠야 한다”라며 “각자 선수들이 책임감을 갖고 한다면 나에게 오는 부담감이 많이 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박정아(왼쪽 둘째)가 일본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A조 일본과 경기에서 승리한 뒤 포효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하이라이트는 도쿄올림픽이었다. 박정아는 8강 진출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던 A조 4차전 한일전에서 대역전극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당시 5세트에서 12-14로 밀리던 한국은 1점만 내줘도 패하는 상황이었다. 박정아는 흔들리지 않고 2연속 득점을 내며 14-14로 추격 발판을 마련했다. 듀스 끝에 한국은 16-14로 5세트를 따내며 8강에 올랐다. 리우의 역적이 도쿄의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박정아가 부진에도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보는 이유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8월30일 타이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9월20일 개막하는 항저우아시안게임까지 곧장 달린다. 세자르 곤살레스 대표팀 감독은 “지난 두 번의 훈련에서 굉장한 만족감을 느꼈다”며 “더 경쟁적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주장 완장을 달고 나설 박정아는 이번에도 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박정아는 ‘클러치 박’이라는 별명처럼,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는 선수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