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리 험프리스(미국)가 지난 14일 옌칭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봅슬레이 여자 모노봅에서 금메달을 딴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옌칭/EPA 연합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1926∼2014)는 3개의 국적을 가진 축구 선수였다. 스페인 프로축구 명문 구단 레알마드리드의 20세기 황금기를 대표하는 이름인 그는 세 나라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나고 자란 아르헨티나에서 6경기, 자신을 간절히 원한 콜롬비아에서 4경기, 전성기를 보낸 스페인에서 31경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명인 그는 어디에서든 환영받았다.
디 스테파노 같은 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운동선수가 국적을 갈아타는 일은 흔하다. 본래 이중국적이었던 이민 2·3세가 국가대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출전 기회를 찾아 부모나 배우자의 나라를 쫓아가는 경우도 있다. 속성으로 전력 강화에 나선 국가가 귀화 선수를 모집하는 일도 잦다. 영광과 욕망을 좇는 선수와 국가의 복잡한 이해관계만큼 국적의 담을 넘는 이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케일리 험프리스(37·봅슬레이)는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을 두달여 앞두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캐나다 국적으로 4번의 올림픽에 나서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낸 그는 2018년 “캐나다 국가대표 봅슬레이팀 코치 토드 헤이스로부터 정신적·언어적 학대에 시달려왔다”고 고백했다. 대표팀 관계자들을 고소했지만 맞고소와 외부 조사로 사태가 장기화되고, 동료들마저 등을 돌리며 상황은 악화됐다. 결국 그는 미국인 남편을 따라 귀화를 결정했다.
베이징 대회 전에 시민권을 딴다는 보장은 없었다. 험프리스는 즉시 귀화 절차를 밟아줄 수 있다는 중국, 러시아 등 몇개 국가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버텼고, 지난해 12월1일 독일 알텐베르게 월드컵 대회 도중 찾아온 이민 면접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는 지난 13일 <뉴욕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어떤 운동선수도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여권을 선택해선 안 된다”며 “(캐나다가 아닌) 다른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면 내가 원하는 국가를 대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험프리스는 지난 14일 신설 종목인 여자 모노봅에서 금메달을 땄고 오는 18일 2인승 경기에 나선다.
제이크 첼리오스(중국·위)가 지난 10일 베이징 우커송 스포츠센터에서 미국을 상대로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아이스하키 남자 예선전 경기를 치르고 있다. 베이징/EPA 연합뉴스
제이크 첼리오스(31·아이스하키)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이름을 바꿨다. 바뀐 이름은 지에커 카이라오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생에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인 크리스 첼리오스(60)를 아버지로 둔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국가대표팀으로 뛰었다. 아버지 크리스는 <월스트리트저널>과 한 인터뷰에서 “아들은 여전히 미국인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간절하게 경기를 뛰고 싶어 했고 나는 100% 지지한다”고 말했다.
중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용병구단’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팀 소속 25명 중 19명이 미국과 캐나다, 러시아 출신 선수로 수혈됐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대륙간하키리그(KHL) 소속 쿤룬 레드스타에서 뛴다. 쿤룬 레드스타는 중국이 베이징겨울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2016년 창설한 베이징 연고 팀으로 귀화 선수들을 모셔오는 징검다리가 되어 왔다.
대대적인 프로젝트였지만 성과는 초라하다. 중국은 그룹 예선에서 미국에 0-8, 독일에 2-3, 캐나다에 0-5로 졌고, 8강 진출권을 두고 벌인 예선 플레이오프에서도 캐나다에 2-7로 졌다. 출전국 12개 중 최악의 성적이다. 이들이 속한 쿤룬 레드스타 역시 올 시즌 9승 39패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리처드슨 비아노(아이티)는 16일 옌칭 알파인스키센터에서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알파인스키 남자 회전 경기를 치렀다. 옌칭/로이터 연합뉴스
리처드슨 비아노(20)은 출생지로 다시 돌아온 경우다. 비아노는 3살 때 아이티에서 프랑스로 입양됐다. 그의 양아버지가 스키 강사였던 덕분에 비아노는 자연스럽게 알파인스키 선수로 성장했고 16살이 되던 해 아이티스키연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비아노는 “친구가 장난전화하는 줄 알았다. 전화를 끊고 검색을 해본 뒤에야 아이티에 실제 스키연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2019년 아이티로 국적을 바꿔 국가대표가 됐고, 아이티 역사상 첫 겨울올림픽 참가자로 베이징 땅을 밟았다. 비아노는 알파인스키 남자 대회전 경기에서는 완주하지 못하고 실격됐지만 16일 회전에서는 1·2차 합계 1분59초99로 34위를 차지했다.
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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