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31일 일본과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한국 여자배구가 다시 메달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계적 강호를 잇달아 꺾는 등 이변의 연속이다. ‘원팀 정신’이 기적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을 묶어낸 스테파노 라바리니(42) 감독의 리더십이 있었다.
한국은 4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8강 터키와의 경기에서 3-2(17:25/25:17/28:26/18:25/15:13) 풀세트 접전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2012 런던올림픽 이후 9년 만의 올림픽 준결승 진출이다.
이날 한국은 객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터키(4위)는 한국(13위)보다 세계랭킹이 9단계나 높은 강호다. 사실상 불가능으로 여겨진 승리를 일궈낸 것이다. 주장 김연경(33)조차 경기 뒤 “실은 준결승 진출이 쉽지 않다고 봤다. (걱정에) 잠도 1시간밖에 못 잤다”고 돌아볼 정도다.
이날 승리를 이끈 라바리니 감독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올림픽 준결승에 진출했다는 사실이 쉽사리 체감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꿈을 꾸는 기분이다.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명실상부 배구 명장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 여자 배구 올림픽대표팀이 4일 도쿄 아리아케 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8강전 터키와의 대결에서 이긴 뒤 손가락 4개를 펼쳐 4번째 승리와 4강 진출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탈리아 출신의 라바리니 감독은 2019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더욱이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 출신도 아니다. 프로무대에서 감독으로서 좋은 성적을 내왔다지만, 여러모로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격 없는 소통은 그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는 선수들의 열렬한 ‘팬’처럼 행동한다.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고,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한일전 승리 뒤에는 경기장에 뛰어들어 선수들과 함께 환호했다. 터키를 꺾은 뒤 “선수들에게 항상 본인이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스스로 가능성을 열어줘서 고맙다”고 밝혔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부드러움 뒤에는 치밀한 분석력에서 오는 카리스마가 있다. 그는 각 선수에게 필요한 전술을 주문하고, 상대팀에 따라 맞춤 전략을 만든다. 이날 라바리니 감독은 “항상 우리의 전략을 갖고 경기에 임한다. 신체조건이 좋은 터키와의 경기에서는 서브가 중요하다고 봤다”고 했는데, 실제 5세트에 교체 투입 된 박은진(22)의 위협적인 서브가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이날 공중을 지배하며 맹활약을 펼친 양효진(32)은 “감독님이 올림픽을 준비하며 상대팀에 따른 맞춤 전략을 마련했다. 전략에 따라 엄청난 훈련을 했는데, 그 과정이 결과로 나온 것 같다”면서 “감독님은 비디오를 엄청나게 본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 가르쳐주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4일 일본 아리아케 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 한국과 터키의 경기가 끝난 뒤 김연경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라바리니 감독의 꿈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한국은 오는 6일 준결승전을 치른다. 남은 경기 가운데 한 경기만 승리해도 최소한 동메달을 획득한다. 만약 올림픽 메달을 따면, 1976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 만이다.
도쿄/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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